야에야마의 대지를 개척한 대만계 이주자의 고난
시마다 나가마사 씨
생년:1944 년
출신지:이시가키시
가족이 대만에서 이주하다
제가 태어난 곳은 이리오모테지마의 오하라입니다만, 이시가키지마의 다케다에서 자랐고 여기에 쭉 살고 있어요. 저의 아버지 료켄푸쿠는 1937년 대만의 타이중에서 이시가키지마로 이주해 왔죠. 아버지는 처음에 혼자 왔지만, 삶의 기반이 마련되자 바로 가족들을 이시가키지마로 불렀어요. 전쟁이 시작되자 이리오모테지마로 대피했고, 그곳에서 제가 태어났죠. 종전 직후 이시가키지마로 돌아와 현재 이시가키지마 제당이 있는 나구라에서 한동안 고구마를 재배했어요. 종전 후 전쟁터에서 주민들이 돌아오면 식량이 부족해질 것을 예상해서 아버지는 재빨리 고구마 생산량을 늘렸고, 그 덕에 돈을 꽤 벌었습니다.
이시가키지마의 파인애플 산업
그 돈으로 파인애플 재배를 시작했고 파인애플 공장도 세웠죠. 항상 우리 집에는 더부살이로 일하는 인부들이 있었고, 긴 테이블에 20명 정도가 둘러앉아 식사를 했어요. 아버지가 이시가키지마에 파인애플 공장을 지은 이유는, 1935년에 대만 자본의 다이도 척식이라는 회사가 설립되었어요. 그 회사의 책임자는 린파쓰 씨라는 분인데, 그는 농업 종사자를 대만에서 모집해 이시가키지마로 데리고 왔어요. 대부분이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는데, 그중에서 아버지는 대만에서 일본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귀중한 인력으로 대우받았고, 생활이 금방 편해져서 대만에서 가족을 불러올 수 있었죠. 1935년에 파인애플 산업을 시작했고 1938년에는 파인애플 통조림이 만들어졌어요.
파인애플 산업의 존속 위기
그런데 1941년에 일본군이 파인애플 생산을 금지했답니다. 파인애플은 사치품이니 만들지 말라더군요. 게다가 통조림을 만들 금속도 부족해서 통조림을 공급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어요. 공장도 병영으로 사용되었죠. 그래서 대만인들은 바나나와 땅콩, 차를 재배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대만인 농업 지도자가 절대로 파인애플 모종을 버리면 안 된다고 해서, 재배가 금지된 파인애플 모종을 산에 숨겨 두었다더군요. 모종을 보존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이리오모테지마에서 이시가키지마로 돌아온 이유는 파인애플을 재배하기 위해서였어요. 아버지가 이리오모테지마로 대피하기 전에 기반 정비의 토지 개량을 의뢰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버지는 물소 세 마리를 데리고 이리오모테지마로 건너갔죠. 종전 후, 데려간 물소 중 한 마리는 이시가키지마로 다시 데려오고 싶어서 나머지 물소 두 마리는 이리오모테지마의 선주에게 뱃삯으로 양도했어요. 데려온 물소 한 마리를 이용해 나구라에서 고구마 재배를 시작했죠.
대만인 배척 운동
1935년 무렵에 대만에서 물소를 데리고 왔어요. 이시가키지마의 주민들은 물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대만인에게 섬의 경작지를 다 빼앗길 거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죠. 1937년 무렵부터 물소 배척 운동이 시작되었어요. 대만에서 들여온 물소는 검역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륙을 거부당했습니다. 섬 주민들의 물소와 파인애플에 대한 반감은 점점 커졌고, 대만인에 대한 배척 운동도 일어났죠.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1945년에 일본이 전쟁에 패배해 일본에 거주하는 대만인이 무국적이 되어 외국인으로서 취급되었을 때, 야에야마 군도 정부는 비옥하고 입지 조건이 좋은 나구라에서 대만인을 이동시키려고 했어요. 말라리아 유병지역에 대만인을 가두려는 정책을 시행했죠. 하지만 아버지는 그 정책에 앞장서서 참가했어요. 그 이유는 아버지가 지금껏 일본 국적으로 이득을 봤기 때문이죠. 일본이 패전하면 외국인 취급을 받아 시민권을 잃고 선거권도 잃는데다가, 소작농을 계속하다 보면 이대로는 시민권도 재산도 다 잃게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다케다는 이시가키시의 토지니까 그 땅을 빌려서 나중에 매입하면 토지는 재산으로서 자기 것이 되는 게 아닐까, 아버지는 그게 훨씬 좋다고 생각해서 솔선해 대만인들에게 설명하고 희망자를 모집해 다케다로 이주했습니다.
말라리아를 이겨내고
대만인이 말라리아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군요. 섬의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이시가키지마의 주민들은 몇 개월 동안 시라미즈 등으로 대피했다가 많은 사람이 죽어 버린 슬픈 사건이 있었죠. 말라리아로 죽은 대만인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그 이유는 음식의 차이인 것 같군요. 대만인은 단백질을 잘 섭취했죠. 농사를 지으면서 돼지, 닭 등의 가축을 기르고 그것들을 식량으로 삼거나, 강에서 뱀장어나 자라를 잡고 덫을 놓아 멧돼지도 잡았거든요. 당시의 이시가키지마에는 그런 단백질 공급원들이 잔뜩 있었어요. 그런데 현지인들은 그런 시도를 별로 하지 않았죠. 대만인은 식문화의 차이 때문에 말라리아에 대한 저항력도 완전히 달랐던 것 같습니다.
우리 집은 파인애플 농장과 파인애플 공장을 경영했기 때문에 더부살이로 일하는 인부들이 있었어요. 미야코지마나 오키나와 본섬에서 온 사람은 바로 말라리아에 걸려 버렸죠. 그 무렵에는 정부가 말라리아 박멸 활동을 펼쳤어요. 미군의 원조를 받아 치료약을 주거나, DDT(살충제)를 뿌리거나, 모기의 발생원인 강을 소독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가 중학생이 될 무렵까지 말라리아 박멸 활동이 진행되었죠. 말라리아 환자가 있는 집에는 빨간 깃발을 걸어서 그곳에 말라리아 환자가 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게 했어요. 우리 집에는 자주 말라리아 깃발이 걸려 있었답니다.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몸을 떨기 시작했어요. 죽은 사람은 없었는데,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은 말라리아에 바로 걸리곤 했죠.
종전 후의 부흥과 이주자
1935년 무렵부터 대만인들이 나구라의 개간을 시작했어요. 논을 만든 것도 대만인이고, 근처의 이노가키 둑을 쌓은 것도 대만인이었죠. 다 같이 힘들게 생산 기반을 다졌는데도, 1944년에 대만으로 돌아가게 된 겁니다. 약 10년에 걸쳐 만든 생산 기반을 남겨두고 대만인들은 돌아가 버렸어요.
대만인은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나구라의 빈 밭에는 이민자들이 들어왔어요. 빈 밭은 대만인이 개척한 우량 농지였죠. 파인애플과 사탕수수 등의 환금 작물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정착했어요. 나구라에 정착한 사람은 미야코 출신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는 오키나와 본섬, 그리고 요나구니지마 등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왔어요. 우리 학교도 그랬습니다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매일같이 전학생이 왔죠. 졸업할 때까지 학교를 다닌 전학생도 있었지만 도중에 떠난 동급생도 많았어요. 온 가족이 이주해 와서 판잣집을 짓고 일을 시작해 봤지만, 일이 맞지 않는다거나 여기서는 생계를 꾸릴 수 없다며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죠. 이토만으로 팔려가는 아이들도 있었고요.
종전 후 문을 연 나구라의 초등학교도 5~6년 지나자 전교생이 300명까지 늘어났어요. 교재와 교실이 턱없이 부족했죠.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씩 학부모들이 모두 소집되어 판자로 학교 건물을 짓거나 우물을 파곤 했답니다. 우리도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생 때는 넓은 농장을 학교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의 사탕수수밭에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일했어요. 피아노를 사기 위해서 사탕수수를 재배해야 한다고 해서요.
1940년대 후반에서부터 1950년대 전후에 걸쳐 이시가키지마 동부와 북부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왔습니다. 이주자들은 파인애플을 재배하기 위한 모종을 갖고 있지 않았죠. 우리 아버지는 파인애플 모종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저는 중학교 여름방학 때도 놀러도 못 가고 매일매일 파인애플 모종을 세어 농가에 전달해 주는 일을 도왔어요. 아버지는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모종을 빌려 주었고, 수확한 후 모종이 돌아오면 다음 생산자에게 빌려 주었죠. 그렇기 때문에 집에는 현금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1950년부터 린파쓰 씨의 파인애플 공장 등, 우리 아버지의 공장도 포함한 4개의 공장을 통합해 ‘류큐 통조림’이라는 큰 회사를 세웠어요. 그런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생산자들에게 파인애플을 심게 하고 전부 매입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죠. 아버지는 회사의 농무부장이었고 직접 파인애플도 재배하고 있었어요. 당시 우리 집은 B엔(미군의 군표)으로 환산하면 120만 엔이 되는 77평짜리 집을 지었어요. 파인애플의 판매 대금을 믿고 집을 지었는데, 급격히 늘린 파인애플의 증식분을 공장이 다 처리하지 못해서 대량의 파인애플을 썩혀 버린 겁니다. 아버지는 공장장이라는 입장상 자기 것부터 먼저 매입할 순 없었기에, 결국 자신의 파인애플은 죄다 썩어서 버려야 했어요. 결국 모종 대금도 파인애플 판매 대금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우리집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죠.
무국적이었던 시절
종전 후 국적에 관해서는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었어요. 전쟁 전에 아버지가 일본인으로서 이시가키지마로 이주해 왔죠. 일본이 전쟁에 졌기 때문에 종전 후에는 외국인으로 취급되어 시민권을 상실했어요. 그 후로는 체류 허가증을 항상 소지해야 했고요.
고등학생이 된 후, 농업 클럽 발표회에서 저는 1학년 때부터 몇 번이고 현외 파견 후보로 뽑혔지만 여권이 없어서 결국 파견되지 못했죠. 저는 야에야마에서 태어났을 때는 일본인 국적이었습니다만,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발효되면서부터 일본인이 아니게 되었어요. 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아버지가 재산을 압류당해서 결국 저는 농사를 짓게 되었죠. 저는 일본 국적이 없어서 제도 자금을 빌릴 수 없었고, 정부의 금융 기관도 이용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결혼 문제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 여자와 결혼했을 경우, 태어난 아이가 사생아가 되어 버리죠. 그게 큰 걱정거리였어요.
아버지는 전쟁 전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은 친일파였습니다. 어린 우리가 대만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테니, 자녀들을 일본으로 귀화시키는 일이 아버지의 가장 큰 목표였죠. 당시 법무성의 출장 기관이 나하에 있었어요. 거기와 몇 번이고 서류를 주고받았죠. 서류가 접수된 건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귀화 신청을 한 것은 다섯 가족뿐이었고요. 귀화하려면 대만에서 국적 이탈 증명서를 발급받아 오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야에야마에서 태어나서 대만에 호적이 없기 때문에 발급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는 전쟁 전에 일본인으로서 야에야마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전쟁에 지는 바람에 우리 국적이 없어졌단 말입니다. 그러니 무국적으로 접수해 주십시오”라고 끈질기게 협상했어요. 결국 귀화 신청을 접수해 주더군요.
그런데 아버지가 자신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귀화하지 않겠다며, 우리만 귀화하라고 해서 장남인 형을 호주로 하여 가족의 귀화 신청을 했습니다. 형제 전원의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저와 여동생, 남동생의 신청은 기각되었어요. 아버지를 호주로 했으면 가족 모두 귀화할 수 있었는데, 형이 호주였기 때문에 미성년자인 우리는 귀화할 수 없었죠. 스무 살이 되자마자 귀화 신청서를 제출했어요. 그로부터 일 년 만에 허가가 나더군요. 사실 그해 9월에 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직전인 7월에 귀화가 인정되었어요. 그때 허가가 나지 않았다면 제 맏딸은 사생아가 될 뻔 했죠.
대만 이주자의 시선으로 본 종전 후
어쨌든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일본인은 1등 국민, 오키나와인은 2등 국민, 대만인은 3등 국민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전쟁 전후에 걸쳐 대만인들은 고생을 많이 했어요. 대만인이 파인애플 산업을 들여왔지만 그 파인애플 산업과 물소조차도 배척당했죠. 대만인에 대해서 좋은 요인은 없었던 것 같군요. 그래도, 그래도 역시 우리는 이 섬이 좋아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섬은 일하는 보람이 있고, 그만한 자원이 있고 성공할 요소가 있어요.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현지 주민들보다 훨씬 고생은 많이 했을 겁니다. 그래도 고생한 만큼의 대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종전 후 다케다에서는 양질의 파인애플과 망고가 많이 수확되었어요. 여러 대만 과일을 이시가키지마에 옮겨 심으면 과일 왕국을 하나 만들 수 있겠죠. 그러니 야에야마의 땅은 매우 소중한 자원이라는 겁니다. 지금의 정치는 농업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지금 시대에는 억지력에 의해 평화가 유지된다고들 하는데, 남을 위협해 평화를 유지하기보다는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서로 빼앗기보다 나누어야 하는 시대가 아닐까요? 그러니 억지력이 아니라 평화적인 외교로 평온한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요? 청년들이 그런 부분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좋겠군요.
시마다 나가마사 씨의 아버지 료켄푸쿠 씨는 전쟁 전 대만 타이중으로부터의 이주자이며, 야에야마의 파인애플 산업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대만계 이주자의 자손으로서 이시가키지마에서 태어나 자란 나가마사 씨는 전후 무국적 상태에서 고생 끝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그 후 나가마사 씨는 대만과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도입해서 야에야마의 과수 재배 발전을 위해 힘썼습니다.
가족이 대만에서 이주하다
제가 태어난 곳은 이리오모테지마의 오하라입니다만, 이시가키지마의 다케다에서 자랐고 여기에 쭉 살고 있어요. 저의 아버지 료켄푸쿠는 1937년 대만의 타이중에서 이시가키지마로 이주해 왔죠. 아버지는 처음에 혼자 왔지만, 삶의 기반이 마련되자 바로 가족들을 이시가키지마로 불렀어요. 전쟁이 시작되자 이리오모테지마로 대피했고, 그곳에서 제가 태어났죠. 종전 직후 이시가키지마로 돌아와 현재 이시가키지마 제당이 있는 나구라에서 한동안 고구마를 재배했어요. 종전 후 전쟁터에서 주민들이 돌아오면 식량이 부족해질 것을 예상해서 아버지는 재빨리 고구마 생산량을 늘렸고, 그 덕에 돈을 꽤 벌었습니다.
이시가키지마의 파인애플 산업
그 돈으로 파인애플 재배를 시작했고 파인애플 공장도 세웠죠. 항상 우리 집에는 더부살이로 일하는 인부들이 있었고, 긴 테이블에 20명 정도가 둘러앉아 식사를 했어요. 아버지가 이시가키지마에 파인애플 공장을 지은 이유는, 1935년에 대만 자본의 다이도 척식이라는 회사가 설립되었어요. 그 회사의 책임자는 린파쓰 씨라는 분인데, 그는 농업 종사자를 대만에서 모집해 이시가키지마로 데리고 왔어요. 대부분이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는데, 그중에서 아버지는 대만에서 일본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귀중한 인력으로 대우받았고, 생활이 금방 편해져서 대만에서 가족을 불러올 수 있었죠. 1935년에 파인애플 산업을 시작했고 1938년에는 파인애플 통조림이 만들어졌어요.
파인애플 산업의 존속 위기
그런데 1941년에 일본군이 파인애플 생산을 금지했답니다. 파인애플은 사치품이니 만들지 말라더군요. 게다가 통조림을 만들 금속도 부족해서 통조림을 공급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어요. 공장도 병영으로 사용되었죠. 그래서 대만인들은 바나나와 땅콩, 차를 재배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대만인 농업 지도자가 절대로 파인애플 모종을 버리면 안 된다고 해서, 재배가 금지된 파인애플 모종을 산에 숨겨 두었다더군요. 모종을 보존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이리오모테지마에서 이시가키지마로 돌아온 이유는 파인애플을 재배하기 위해서였어요. 아버지가 이리오모테지마로 대피하기 전에 기반 정비의 토지 개량을 의뢰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버지는 물소 세 마리를 데리고 이리오모테지마로 건너갔죠. 종전 후, 데려간 물소 중 한 마리는 이시가키지마로 다시 데려오고 싶어서 나머지 물소 두 마리는 이리오모테지마의 선주에게 뱃삯으로 양도했어요. 데려온 물소 한 마리를 이용해 나구라에서 고구마 재배를 시작했죠.
대만인 배척 운동
1935년 무렵에 대만에서 물소를 데리고 왔어요. 이시가키지마의 주민들은 물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대만인에게 섬의 경작지를 다 빼앗길 거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죠. 1937년 무렵부터 물소 배척 운동이 시작되었어요. 대만에서 들여온 물소는 검역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륙을 거부당했습니다. 섬 주민들의 물소와 파인애플에 대한 반감은 점점 커졌고, 대만인에 대한 배척 운동도 일어났죠.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1945년에 일본이 전쟁에 패배해 일본에 거주하는 대만인이 무국적이 되어 외국인으로서 취급되었을 때, 야에야마 군도 정부는 비옥하고 입지 조건이 좋은 나구라에서 대만인을 이동시키려고 했어요. 말라리아 유병지역에 대만인을 가두려는 정책을 시행했죠. 하지만 아버지는 그 정책에 앞장서서 참가했어요. 그 이유는 아버지가 지금껏 일본 국적으로 이득을 봤기 때문이죠. 일본이 패전하면 외국인 취급을 받아 시민권을 잃고 선거권도 잃는데다가, 소작농을 계속하다 보면 이대로는 시민권도 재산도 다 잃게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다케다는 이시가키시의 토지니까 그 땅을 빌려서 나중에 매입하면 토지는 재산으로서 자기 것이 되는 게 아닐까, 아버지는 그게 훨씬 좋다고 생각해서 솔선해 대만인들에게 설명하고 희망자를 모집해 다케다로 이주했습니다.
말라리아를 이겨내고
대만인이 말라리아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군요. 섬의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이시가키지마의 주민들은 몇 개월 동안 시라미즈 등으로 대피했다가 많은 사람이 죽어 버린 슬픈 사건이 있었죠. 말라리아로 죽은 대만인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그 이유는 음식의 차이인 것 같군요. 대만인은 단백질을 잘 섭취했죠. 농사를 지으면서 돼지, 닭 등의 가축을 기르고 그것들을 식량으로 삼거나, 강에서 뱀장어나 자라를 잡고 덫을 놓아 멧돼지도 잡았거든요. 당시의 이시가키지마에는 그런 단백질 공급원들이 잔뜩 있었어요. 그런데 현지인들은 그런 시도를 별로 하지 않았죠. 대만인은 식문화의 차이 때문에 말라리아에 대한 저항력도 완전히 달랐던 것 같습니다.
우리 집은 파인애플 농장과 파인애플 공장을 경영했기 때문에 더부살이로 일하는 인부들이 있었어요. 미야코지마나 오키나와 본섬에서 온 사람은 바로 말라리아에 걸려 버렸죠. 그 무렵에는 정부가 말라리아 박멸 활동을 펼쳤어요. 미군의 원조를 받아 치료약을 주거나, DDT(살충제)를 뿌리거나, 모기의 발생원인 강을 소독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가 중학생이 될 무렵까지 말라리아 박멸 활동이 진행되었죠. 말라리아 환자가 있는 집에는 빨간 깃발을 걸어서 그곳에 말라리아 환자가 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게 했어요. 우리 집에는 자주 말라리아 깃발이 걸려 있었답니다.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몸을 떨기 시작했어요. 죽은 사람은 없었는데,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은 말라리아에 바로 걸리곤 했죠.
종전 후의 부흥과 이주자
1935년 무렵부터 대만인들이 나구라의 개간을 시작했어요. 논을 만든 것도 대만인이고, 근처의 이노가키 둑을 쌓은 것도 대만인이었죠. 다 같이 힘들게 생산 기반을 다졌는데도, 1944년에 대만으로 돌아가게 된 겁니다. 약 10년에 걸쳐 만든 생산 기반을 남겨두고 대만인들은 돌아가 버렸어요.
대만인은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나구라의 빈 밭에는 이민자들이 들어왔어요. 빈 밭은 대만인이 개척한 우량 농지였죠. 파인애플과 사탕수수 등의 환금 작물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정착했어요. 나구라에 정착한 사람은 미야코 출신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는 오키나와 본섬, 그리고 요나구니지마 등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왔어요. 우리 학교도 그랬습니다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매일같이 전학생이 왔죠. 졸업할 때까지 학교를 다닌 전학생도 있었지만 도중에 떠난 동급생도 많았어요. 온 가족이 이주해 와서 판잣집을 짓고 일을 시작해 봤지만, 일이 맞지 않는다거나 여기서는 생계를 꾸릴 수 없다며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죠. 이토만으로 팔려가는 아이들도 있었고요.
종전 후 문을 연 나구라의 초등학교도 5~6년 지나자 전교생이 300명까지 늘어났어요. 교재와 교실이 턱없이 부족했죠.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씩 학부모들이 모두 소집되어 판자로 학교 건물을 짓거나 우물을 파곤 했답니다. 우리도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생 때는 넓은 농장을 학교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의 사탕수수밭에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일했어요. 피아노를 사기 위해서 사탕수수를 재배해야 한다고 해서요.
1940년대 후반에서부터 1950년대 전후에 걸쳐 이시가키지마 동부와 북부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왔습니다. 이주자들은 파인애플을 재배하기 위한 모종을 갖고 있지 않았죠. 우리 아버지는 파인애플 모종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저는 중학교 여름방학 때도 놀러도 못 가고 매일매일 파인애플 모종을 세어 농가에 전달해 주는 일을 도왔어요. 아버지는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모종을 빌려 주었고, 수확한 후 모종이 돌아오면 다음 생산자에게 빌려 주었죠. 그렇기 때문에 집에는 현금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1950년부터 린파쓰 씨의 파인애플 공장 등, 우리 아버지의 공장도 포함한 4개의 공장을 통합해 ‘류큐 통조림’이라는 큰 회사를 세웠어요. 그런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생산자들에게 파인애플을 심게 하고 전부 매입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죠. 아버지는 회사의 농무부장이었고 직접 파인애플도 재배하고 있었어요. 당시 우리 집은 B엔(미군의 군표)으로 환산하면 120만 엔이 되는 77평짜리 집을 지었어요. 파인애플의 판매 대금을 믿고 집을 지었는데, 급격히 늘린 파인애플의 증식분을 공장이 다 처리하지 못해서 대량의 파인애플을 썩혀 버린 겁니다. 아버지는 공장장이라는 입장상 자기 것부터 먼저 매입할 순 없었기에, 결국 자신의 파인애플은 죄다 썩어서 버려야 했어요. 결국 모종 대금도 파인애플 판매 대금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우리집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죠.
무국적이었던 시절
종전 후 국적에 관해서는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었어요. 전쟁 전에 아버지가 일본인으로서 이시가키지마로 이주해 왔죠. 일본이 전쟁에 졌기 때문에 종전 후에는 외국인으로 취급되어 시민권을 상실했어요. 그 후로는 체류 허가증을 항상 소지해야 했고요.
고등학생이 된 후, 농업 클럽 발표회에서 저는 1학년 때부터 몇 번이고 현외 파견 후보로 뽑혔지만 여권이 없어서 결국 파견되지 못했죠. 저는 야에야마에서 태어났을 때는 일본인 국적이었습니다만,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발효되면서부터 일본인이 아니게 되었어요. 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아버지가 재산을 압류당해서 결국 저는 농사를 짓게 되었죠. 저는 일본 국적이 없어서 제도 자금을 빌릴 수 없었고, 정부의 금융 기관도 이용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결혼 문제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 여자와 결혼했을 경우, 태어난 아이가 사생아가 되어 버리죠. 그게 큰 걱정거리였어요.
아버지는 전쟁 전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은 친일파였습니다. 어린 우리가 대만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테니, 자녀들을 일본으로 귀화시키는 일이 아버지의 가장 큰 목표였죠. 당시 법무성의 출장 기관이 나하에 있었어요. 거기와 몇 번이고 서류를 주고받았죠. 서류가 접수된 건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귀화 신청을 한 것은 다섯 가족뿐이었고요. 귀화하려면 대만에서 국적 이탈 증명서를 발급받아 오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야에야마에서 태어나서 대만에 호적이 없기 때문에 발급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는 전쟁 전에 일본인으로서 야에야마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전쟁에 지는 바람에 우리 국적이 없어졌단 말입니다. 그러니 무국적으로 접수해 주십시오”라고 끈질기게 협상했어요. 결국 귀화 신청을 접수해 주더군요.
그런데 아버지가 자신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귀화하지 않겠다며, 우리만 귀화하라고 해서 장남인 형을 호주로 하여 가족의 귀화 신청을 했습니다. 형제 전원의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저와 여동생, 남동생의 신청은 기각되었어요. 아버지를 호주로 했으면 가족 모두 귀화할 수 있었는데, 형이 호주였기 때문에 미성년자인 우리는 귀화할 수 없었죠. 스무 살이 되자마자 귀화 신청서를 제출했어요. 그로부터 일 년 만에 허가가 나더군요. 사실 그해 9월에 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직전인 7월에 귀화가 인정되었어요. 그때 허가가 나지 않았다면 제 맏딸은 사생아가 될 뻔 했죠.
대만 이주자의 시선으로 본 종전 후
어쨌든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일본인은 1등 국민, 오키나와인은 2등 국민, 대만인은 3등 국민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전쟁 전후에 걸쳐 대만인들은 고생을 많이 했어요. 대만인이 파인애플 산업을 들여왔지만 그 파인애플 산업과 물소조차도 배척당했죠. 대만인에 대해서 좋은 요인은 없었던 것 같군요. 그래도, 그래도 역시 우리는 이 섬이 좋아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섬은 일하는 보람이 있고, 그만한 자원이 있고 성공할 요소가 있어요.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현지 주민들보다 훨씬 고생은 많이 했을 겁니다. 그래도 고생한 만큼의 대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종전 후 다케다에서는 양질의 파인애플과 망고가 많이 수확되었어요. 여러 대만 과일을 이시가키지마에 옮겨 심으면 과일 왕국을 하나 만들 수 있겠죠. 그러니 야에야마의 땅은 매우 소중한 자원이라는 겁니다. 지금의 정치는 농업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지금 시대에는 억지력에 의해 평화가 유지된다고들 하는데, 남을 위협해 평화를 유지하기보다는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서로 빼앗기보다 나누어야 하는 시대가 아닐까요? 그러니 억지력이 아니라 평화적인 외교로 평온한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요? 청년들이 그런 부분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좋겠군요.
시마다 나가마사 씨의 아버지 료켄푸쿠 씨는 전쟁 전 대만 타이중으로부터의 이주자이며, 야에야마의 파인애플 산업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대만계 이주자의 자손으로서 이시가키지마에서 태어나 자란 나가마사 씨는 전후 무국적 상태에서 고생 끝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그 후 나가마사 씨는 대만과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도입해서 야에야마의 과수 재배 발전을 위해 힘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