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부터의 발자취전쟁 체험자 전시/전후 증언 영상

사법의 길, 인권과 마주하며

후루겐 사네요시 씨

생년:1929 년

출신지:구니가미촌

어린 시절부터 사범학교까지

 저는 오키나와 본섬 북부의 구니가미촌 아다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때 병 때문에 돌아가셨죠. 어머니는 성실한 분이었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애쓰며 여자 혼자 힘으로 우리 남매를 키워 주셨어요. 우리는 5남매였는데, 남자 넷에 막내 여동생이 하나 있었죠. 저는 넷째였고요.
 1944년 4월에 슈리의 오키나와 사범학교에 입학했죠. 2학기에는 딱 일주일만 수업을 했고, 둘째 주부터는 아무 설명도 없이 매일같이 오키나와를 전쟁으로 몰아가는 듯한 기지 조성 작업을 해야 했어요. 사범학교의 류콘 방공호에 학생 전체가 들어가게 된 건, 1945년 3월 23일에 오키나와 전역에 걸친 미군의 공습이 시작된 뒤였죠. 그게 오키나와 전투의 시작이었어요.

철혈 근황 사범대로 동원되다

 3월 31일에 군 사령부에서 직접 방위 소집을 받게 됐어요. 철혈 근황 사범대로 편성돼서 군 사령부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으며 여러 가지 활동을 하게 됐죠. 군 사령부에는 발전 시설이 있었는데, 발전기를 식히는 냉각수를 공급하는 임무를 우리 1학년 스무 명이 맡게 됐어요. 제32군의 우시지마 중장을 정점으로 하는 사령부 방공호는 10m만 들어가도 깜깜해서 (아무것도)보이지 않았죠. 발전 시설에서 전등을 켜는 데 필요한 작업은 단순한 일인 것 같아도 중요한 임무였어요.
 (치열한 전투로)철혈 근황 사범대에도 계속해서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나왔는데, 5월 4일 밤에 동기생과 둘이서 근처 우물에서 냉각수를 길어다가 발전 시설까지 날랐죠. 그 작업을 계속 하다가 드럼통이 꽉 차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그런 작업을 반복했어요. 한밤중에 드럼통이 꽉 찼기 때문에 잠깐 쉬려고 저는 발전기 바로 옆의 구덩이로 뛰어내렸죠. 바로 그 직후에 함포가 발사되었고, 그 파편이 지금까지 같이 냉각수를 나르던 동기생의 목과 어깨에 맞아서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쓰러져서 즉사했어요. 그런 일들이 제 주변에서 일어났답니다.
 5월 27일에 (군 사령부가 남부로)퇴각하게 됐어요. 발가락 두 개가 잘려 걸을 수 없게 된 친구들을 네 명이 교대로 업고 행군했죠. (이동하며)밭두렁을 걷던 중, (쓰러져 누운 채)죽어 있는 어머니의 가슴 위를 아직 생후 반년 정도밖에 안 된 아기가 뭔가에 쫓기듯이 어머니의 가슴 위를 기어다니고 있더군요. 그 아기가 그 후 어떻게 되었을지, 무사히 전쟁 후의 시대를 맞이했을지, 그곳을 지나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지, 아니면 그 아이도 결국 탈진해서 죽었을지, 함포 파편을 맞고 어머니의 품에서 그 아이도 죽고 말았을지, 이런저런 상상을 몇 번이고 거듭했어요.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그 광경이 바로 떠오르죠. 그런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 슈리에서 이토만의 마부니로 이동했어요.

해산 명령과 교장 선생님의 말

 6월 18일에 전령에 의해 오키나와 사범대에 해산 명령이 떨어졌어요. 북부에는 아직 일본군이 남아 있으니까 전선을 돌파해 그 일본군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령이 본부에서 온 거죠. 해산 명령을 받은 다음날 저녁에 우리는 서너 명씩 조를 짜서 북부로의 전선 돌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노다 교장과 이구치라는 이름의 배속 장교, 고하구라라는 이름의 최상급생까지 세 명이 우리가 들어가 있던 바위 그늘을 찾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마지막 명령을 전달했죠. (교장 선생님은)왼손에 자기가 쓰던 작은 메모장 같은 걸 들고 그걸 우리한테 보여 주면서 이미 110여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고 하시더군요. 교장 선생님은 이어서 앞으로 오키나와의 미래를 짊어질 사람은 너희들이니까 죽으면 안 된다고, 반드시 살아남으라고, 그런 이야기를 우리 1학년 학생들에게 해 주셨어요. 그 귀중한 훈시는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줬죠. 지금도 종종 그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부니에서 포로가 되다

 다음날(6월 22일)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구니가미로의 돌파를 결심하고)해안에서부터 기어가듯이 해서 바위를 올라갔더니, 바위 그늘 맨 위쪽에는 총을 들고 있는 미군들의 모습도 보였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도록 몸을 숨기면서 구니가미로 돌파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은 상태였는데, 해안에서 이동하려던 순간 총을 든 미군을 만나 거기서 포로가 되었죠. 이토만의 마부니에 있다가 다음날에는 긴의 야카 수용소로 옮겨져서 수용되었어요.

알몸으로 하와이로 수송되다

 그리고 열흘쯤 지난 후, 행선지도 모르는 채 트럭에 실려서 야카의 포로수용소에서 차탄 가데나 요미탄 근처까지 수많은 포로들이 실려갔어요. 앞바다에는 커다란 수송선이 기다리고 있었고 주정에서 그 수송선으로 갈아탔죠. 그 수송선에는 창고가 있었고 우리는 거기까지 내려갔어요. 발밑에는 시멘트 가루가 남아 있었는데 그 위에 서 있어야 했죠. 다들 찝찝해서 앉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더니 일본계 2세 통역사가 와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너희들 방은 여기라고, 그렇게 말한 뒤에 돌아갔어요. 그 수송선 바닥에는 대략 삼사십 명 정도 모여 있었죠. 그런 방이 몇 개 있었던 것 같아요.
 이삼 일마다 한 번씩 (우리는)갑판에 올라가 바닷물을 뒤집어써야 했어요. 팬티 한 장도 주지 않아서 벌거벗은 상태였죠. 하루에 두 번 식사를 했어요. 큰 양동이에 흰쌀밥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반찬이었죠. (식기도 없이 양손에 직접)흰쌀밥을 배급받으면 그 위에 반찬을 얹고 국물이 흐르지 않게 해서 먹었어요. 손을 씻을 만한 곳도 아예 없었기 때문에 자기 손을 핥을 수밖에 없었죠.
 (수송선이)도착한 곳은 하와이의 진주만이었어요. 거기서 상륙할 때 벗겨졌던 반팔 옷과 반바지 (빨아서 포장된 상태로)한 벌씩을 아무렇게나 던져 주더군요. 그래서 알몸이 아니라 옷을 입은 채로 상륙했어요. 그날이 포로로서 외국 땅을 밟는 첫날이었죠. 7월 20일이었어요.
 하와이에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오키나와 출신 주민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헌병들 틈에 숨어서 수용소의 철망 너머로 음식을 몰래 갖다 줬어요. 철망 밖에서 우리를 격려해 주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고 기뻤죠.
 저는 포로수용소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고 네 군데를 전전했어요. 수용소 내에서는 여러 가지 작업을 했죠. 캠프(미군 시설)에서 풀을 베거나 트럭으로 쓰레기를 옮기기도 했어요. 그 외에는 군대 세탁 시설에서의 작업도 있었죠. 하와이와 오키나와를 오가며 물자를 나르는 수송기가 있었는데요. 한동안 그 수송기의 청소를 했어요. 오키나와에서 돌아온 후에 더러워진 물건들을 치우거나 오키나와로 가기 전에 필요한 청소 작업 같은, 한동안 그런 작업을 했었죠. 그 수송기에 몰래 타면 오키나와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어요.

종전을 맞이하며

 어느 날, 미군 시설을 관리하는 경비원들 숙소에서 난리가 났더군요. 포로수용소에 있는 우리 눈에도 철망 너머로 그 모습이 보였죠. 그리고 30분 뒤에 일본계 2세 통역사가 오더니 일본이 졌다고, 항복했다고 말했어요. 그제야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미군이 난리를 피우고 있다는 걸 알았죠. 일본이 항복해 전쟁이 끝났다는 말을 듣자 비로소 이제 살해당하지 않겠구나, 살아남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전쟁이 끝나 포로를 수용할 필요가 없어지면 당장 오키나와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 후로도 1년 정도 수용 생활을 계속했죠.

고향으로의 귀환과 종전 후 생활

 이듬해인 1946년 10월 말에 하와이를 출발해서 도쿄만 우라가에서 오키나와행 수송용 주정(LST)으로 갈아탄 후에, 11월 9일에 비로소 오키나와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나카구스쿠의 구바자키에 도착했고 거기서 상륙했죠. (다음날)구니가미행 차량에 실려 이동했어요. 그 다음날에는 구니가미촌 요나부터 걸어서 제가 태어난 고향(구니가미촌 아다)으로 돌아왔죠.
 아다로 돌아왔더니 제 동급생과 후배들이 하이스쿨이라고 불리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더군요. (제가 다녔던)사범학교는 폐지되었기 때문에 가고 싶어도 돌아갈 학교가 없었죠. 전쟁 때문에 공부를 그만두게 되었기 때문에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어요. 2학년부터 다시 다닐 수 있도록 부탁을 해서 (헨토나 고등학교로의)편입을 인정받았죠. 그날이 바로 제가 종전 후 고향에서 새출발하게 된 날입니다. (당시에는)고등학교라고는 해도 제대로 된 교과서 하나 없었어요. 칠판도 진짜 칠판이 아니라 베니어판에 검은 페인트를 칠해서 칠판으로 쓴 거죠. 그게 당시의 하이스쿨(고등학교)이었어요. 제 아내는 고등학교 동기생입니다. 2학기 자치회장이 저였고 부회장이 아내였죠. 1950년 류큐 대학 최초의 1학년이 바로 우리였고요. 아내도 함께 입학했죠.
 2학년 중반 무렵인 9월에 도쿄로 갔어요. (일을 하면서)어렵게 수험 공부를 한 끝에 간사이 대학교에 합격했죠.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중)당시 오키나와에서는 세나가 가메지로 씨가 있는 오키나와 인민당을 미국민 정부가 가혹하게 탄압했어요.

미군 점령하의 분노와 결의

 미국의 군사 법정에서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죠. 그에 대항하기 위해 오키나와 인민당의 세나가 씨 측은 오키나와 변호사들의 힘을 빌리고자 여러 명의 저명한 변호사들에게 (변호를)부탁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오키나와 인민당의 사건을 맡으면 미국민 정부에게 (변호사 자신도)보복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변호를 맡지 않았죠. 그래서 변호사 없이 재판이 열렸고 판결이 내려졌다는 신문 기사가 났어요. 미국의 지배하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용서할 수 없다고, 저는 분노를 느꼈고 제가 가야 할 길을 정했습니다. 법대를 졸업해 변호사가 되어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오키나와를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인민의 입장, 평화와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길을 걷기로 결심했어요. 간사이 대학을 졸업한 후 류큐 정부 법원의 서기관이 되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쳤고, 법원 서기관의 길을 걷게 됐죠.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오키나와 전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지를 만들고 군대를 배치하고 전쟁 준비를 계속하다 보면 싸움을 멈출 수가 없어요. 지옥과도 같았던 오키나와 전투를 보면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돼요. 헌법에는 다시 전쟁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명명백백히 규정되어 있죠. 헌법이 가리키는 대로 앞으로 나아가,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멈추지 말고 국민이 주인공인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그 길을 짊어질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이라고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후루겐 사네요시 씨는 종전 후 미군 통치하에서 류큐 정부 입법원 의원과 오키나와 인민당 서기장을 역임했고, 일본 반환 후에는 오키나와 현의회 의원을 거쳐 중의원 의원으로 활약했습니다. 자신의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종전 후에는 꾸준히 반전 평화 활동을 계속하며 오키나와의 기지 문제와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힘썼습니다. 의원 퇴직 후에도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오키나와 전투의 실상을 널리 알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