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함께 걸어온 전쟁 후의 시대
나카무라 히데오 씨
생년:1929 년
출신지:모토부정
오키나와 대공습과 격침된 군함의 선원 구조
1944년 7월, 저는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채용 통지를 기다리고 있던 날이 (오키나와 대공습이 있었던)10월 10일이었어요. 10월 10일에 여기(모토부)서 ‘진케이’라는 일본 군함이 미군에 폭격당했죠. 그날 저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친구와 둘이서 통나무배의 노를 저어 그 군함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미군의 비행기가 그 군함에 폭탄을 잔뜩 투하했어요. 군함 주변의 해수면은 흘러나온 석유로 뒤덮였어요. 군함의 선원들은 바다로 뛰어들어 도망을 치고 있었고요. 저는 반쯤 물에 빠진한 부상병을 보고 해군 병사들이 수영을 못 하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해군은 모두 수영을 잘하는 줄 알았으니까요. 친구와 함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는데, 그 사람은 다리를 다친 상태였어요.
시신 회수 명령을 받다
그 후 일주일 동안 두 척의 일본 군함이 폭격당했고, 바다 곳곳에 시신이 떠다니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경찰관이 저를 불러세우더니, 바다의 시신을 모아 오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시신을 모은 뒤 군함을 통째로 바다에 가라앉히는 게 해군의 관례라더군요. 해군에 화장이라는 관례는 없다는 게 정말 비참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10월 10일의 비참한 사건 후, 미군의 폭격을 받은 그 군함은 5일 동안 계속 불탔어요.
예과 연습생으로서 본토로 건너가다
그 무렵 저는 열다섯 살이 되었는데, 예과 연습생이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군대 일을 하지 말고 감시소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산꼭대기의)감시소에서 19일까지 근무를 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3월 1일에 (이바라키현)쓰치우라 해군 항공대로의 채용 통지가 왔어요. 당시에 저는 맨발에 반바지 차림으로 생활했고, 본토는 춥다는 것도 전혀 몰랐어요.
해군의 트럭을 타고(모토부에서) 나하까지 가서, 그때부터 본토에서 예과 연습생 생활이 시작되었죠. 배로 나가사키의 사세보까지 간 뒤, 기차를 타고 나라로 이동했어요. 예과 연습생 3차 시험은 나라에서 진행되었거든요. 오키나와에서 온 수험자 중 두 사람은 불합격했어요. 저를 포함한 3차 시험 합격자들은, 목적지인 쓰치우라는 공습으로 불타고 있으니 와카야마의 고야산에 있는 절에서 교육 훈련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비행기 조종 훈련은 없었어요. 비행기 보관 장소조차 모르는 상태였죠. 연료도 없었고요. 훈련 3개월째에 분대장에게 “너희들의 임무는 아마 수상 특공일 거다”라는 말을 듣고, 그래서 와카야마 시오노미사키 곶의 해안에서 대기하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민가를 빌려서, 거기서 2개월 정도 수상 특공 명령을 기다렸죠. 그리고 종전을 맞이했습니다. 종전을 맞이한 후, (종전 후에는)잠시 구마모토에 있었어요. 거기서는 굉장히 위험한 일을 했지요. 나가사키의 시마바라에서 석탄 등을 운반하거나, 구마모토의 아마쿠사 부근에서 자재를 가져와서 구마모토의 미나마타에 있는 회사로 옮겼어요. 산에이 해운 주식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그 일을 1년 반 정도 했어요. 그 후에 함께 살던 선배한테 오키나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배와 함께 나가사키의 오무라 수용소로 갔다가 거기서 오키나와로 돌아왔지요.
귀향 후의 생활
돌아와 보니 모토부의 마을은 전부 불타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어요. 사거리에 줄지어 있던 관공서나 경찰서 등도 전부 없어져 있더군요. 지금의 관공서는 예전에 초등학교가 있던 곳인데, 전쟁 때문에 초등학교마저 아예 없어진 상태였어요.
종전 후 2년 이상이 지난 1948년 10월 무렵, 선배들은 가다랑어배 낚시를 하고 있었고 저는 가다랑어 낚시에 쓰는 미끼를 조달했습니다. 하지만 겨울에는 가다랑어 조업을 하지 않았으니까 겨울에는 뭘 먹고 살지 고민을 했어요. 그러던 중 선배들 몇이 통나무배 한 척과 그물을 가지고 왔더군요. 하지만 그 시기에 모토부 반도에서는 물고기는 잡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구니가미촌의 헨토나까지 통나무배를 타고 가서, 헨토나의 ‘하마’라는 마을에 6명이 머물면서 오키나와 자리돔을 잡아서 쌀과 교환한 후에 일주일 정도 걸려 모토부로 돌아왔죠. 그때부터 선배가 근처 마을에서 배를 주문 제작했고, 선배가 책임자가 되어 6명이서 고기잡이를 했어요. 그 무렵 저는 19살이었고, 선배 다섯 명은 모두 30대였어요.
북풍이 불면 나고의 교다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배를 짊어지고 기노자의 가타바루까지 산을 넘으며 서쪽에서 동쪽 해안으로 이동했죠. 일단 기노자의 마쓰다라는 마을에서 숙박을 하면서 일주일 동안 바다를 관찰했어요. 그 다음은 지금의 나고에 있는 헤노코에 머물렀어요. 헤노코의 항구에는 물고기가 잔뜩 있더군요. 헤노코에는 쌀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잡은 물 고기를 짊어지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쌀과 교환했죠. 돈으로는 교환하지 않았어요. 갈 때와 올 때 모두 배와 짐을 메고 이동했어요. 미군의 의료용 자루가 있었는데, 거기에 벼를 70kg 정도 담았죠. 6명이 각각 쌀을 자루에 담아 모토부로 돌아갔어요. 우선 쌀을 짊어지고 교다까지 운반한 뒤, 헤노코로 돌아와 배를 짊어지고 교다까지 왔어요. 마지막으로 헤노코에서 짐을 들고 교다로 돌아오는 식으로 산을 세 번 정도 왕복했죠.
그리고 남풍이 불면 오기미의 시오야만까지 갔어요. 시오야만에서 큰 강을 배로 거슬러 올라간 후, 히가시촌의 가와타까지 배를 메고 갔지요. 가와타에서 고기를 잡고 모토부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어요. 그러던 중 선배들은 통나무배에 엔진을 달 수는 없을지 궁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통나무배에 엔진을 달 거라면, 이에지마에 엔진이 잔뜩 버려져 있었거든요. 때마침 이에지마 출입이 시작된 시기기도 했고요.
이에지마의 LCT 폭발 사고
1948년 8월 6일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연락선을 타고 이에지마로 갔는데, 이에 항의 선창에서 미군 배(LCT: 상륙용 주정) 옆에 제가 탄 배가 도착했어요. 그때 대량의 폭탄을 실은 미군 트럭들이 몰려왔고, 적재 작업 중 대폭발을 일으켜 107명이 죽었습니다. 그 날은 더웠기 때문에 저는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려 해변의 둑길 반대편에 가 있던 덕분에 목숨을 건졌죠. 마침 그 무렵에는 오키나와 본섬 주민들이 이에지마의 전사자 유골을 찾으러 왔고, 이에지마 주민들은 본섬 남부로 가서 전사자의 유골을 찾기 위해 친척들끼리 모여 있던 상황이었어요. 폭발 사고 다음 날, 선배 여섯 명이 통나무배를 타고 저를 데리러 왔어요. 당시에는 이에지마로 가는 연락선은 없었으니까요. 선배들이 왔을 때, 저는 해변을 헤매고 있었어요. 선배들은 제게 무사했냐고 말을 걸어 주었죠. 폭발 때문에 모두 죽었고, 해변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어요. 저는 지금까지 우리 가족한테도 예과 연습생으로 갔던 일이나 이에지마 폭발 사고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전쟁 후의 아기야 고기잡이
구루쿤(농어목 물고기)을 잡을 때는, 요즘 말로 하자면 그물몰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아기야’라고 합니다. 바다 밑에서부터 얕은 곳까지 물고기를 밀어 올리는 것, 그걸 ‘아기야’라고 해요. 추운 겨울에만 가능한 방법입니다. 수온은 17~18도 정도, 팬티도 입지 않고 알몸으로 고기잡이를 하죠. 젖은 팬티를 입고 있으면 더 추우니까요. 6명 모두 팬티도 입지 않은 채 ‘아기야’를 했어요.
먹거리는 풍부했고 쌀도 있었어요. 다른 곳은 고구마도 겨우 구할 수 있을 정도였죠. 그리고 미군에게 지급받은 식량 같은 것도 먹었어요. 고기잡이를 하던 무렵에 저는 2년 동안 심부름꾼으로 지냈어요. 선배들과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났으니까, 아침밥은 제가 지어야 했고 저녁도 마찬가지였어요. 물고기를 팔 때도 짐을 가장 많이 짊어져야 했고요. 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2년 정도 그렇게 살다가 군대 일을 하러 떠났습니다.
군대 일과 ‘전과’
군대 일은 지금의 우루마시의 ‘QM(보급 부대) 덴간’에서 했어요. 월급은
(B엔: 미군의 군표로) 150엔~250엔 정도였죠. 거기서는 모두 ‘전과(戦果)’를 올리기 바빴어요. ‘전과’란 도둑질을 말하는데, 미군의 창고에서 통조림 등을 훔쳐서 이시카와의 암시장에 내다 팔아 돈으로 바꿔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죠. 주로 담요나 미제 바지, 시계 등 여러 가지 물건이 있었어요. 담배 등 온갖 물건을 미군 창고에서 훔친 뒤, 숨겨서 기지 밖으로 빼돌리는 게 힘들었죠. 뭐, 그런 게 군대 일이었어요.
그리고 모터 풀(미군의 차량 기지)에서 일할 때는, 미군의 차량으로 10m 정도 주행하면 곧바로 미국 운전면허를 받을 수 있었어요. 면허증에는 사진이 없었죠. 그래서 저는 오키나와 최초의 버스 운전사 10명 정도의 면허를 대신 따 줬어요. 그 대가로 유부초밥을 하나 받고요. 면허를 따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의뢰인 이름의 알파벳 표기를 확인하고 합격하면 서류에 의뢰인의 이름을 적어서 제출했죠.
잠수부로 활약
나하항에 외국 선박이 입항할 때, 잠수해서 배의 스크루나 빌지 펌프(수중 펌프)의 흡입 등을 점검하는 일을 3년 정도 했어요. 그 일은 특별한 면허가 필요하지 않았죠. 아무튼 스크루에 이상이 없는지, 그런 것들을 점검했어요. 그리고 도쿄대학이나 교토대학, 도카이대학의 교수들이 해양 조사를 위해 자유롭게 오키나와에 올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는 미국의 시정권하였으니까, 어류 조사나 해저 조사의 의뢰가 들어왔어요. 제가 잠수 회사를 만들고 일을 받기로 했죠. 일은 저 혼자 했습니다.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청년들에게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일단 전쟁에 대해서입니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지. 형제 간의 싸움도 전쟁의 일종이죠. 일단 형제끼리 싸움은 절대로 하지 말 것. 그리고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정원에 있는 화분이라도 좋으니까, 파 같은 채소를 키우는 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카무라 히데오 씨는 침몰선 인양 등 해양 구조와 해저 조사 등을 하며 오키나와의 거의 모든 바다에 잠수했습니다. 또한 맨몸 잠수 세계 대회에 일본 대표로 출전해 3위에 입상하는 등,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오키나와 대공습과 격침된 군함의 선원 구조
1944년 7월, 저는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채용 통지를 기다리고 있던 날이 (오키나와 대공습이 있었던)10월 10일이었어요. 10월 10일에 여기(모토부)서 ‘진케이’라는 일본 군함이 미군에 폭격당했죠. 그날 저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친구와 둘이서 통나무배의 노를 저어 그 군함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미군의 비행기가 그 군함에 폭탄을 잔뜩 투하했어요. 군함 주변의 해수면은 흘러나온 석유로 뒤덮였어요. 군함의 선원들은 바다로 뛰어들어 도망을 치고 있었고요. 저는 반쯤 물에 빠진한 부상병을 보고 해군 병사들이 수영을 못 하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해군은 모두 수영을 잘하는 줄 알았으니까요. 친구와 함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는데, 그 사람은 다리를 다친 상태였어요.
시신 회수 명령을 받다
그 후 일주일 동안 두 척의 일본 군함이 폭격당했고, 바다 곳곳에 시신이 떠다니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경찰관이 저를 불러세우더니, 바다의 시신을 모아 오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시신을 모은 뒤 군함을 통째로 바다에 가라앉히는 게 해군의 관례라더군요. 해군에 화장이라는 관례는 없다는 게 정말 비참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10월 10일의 비참한 사건 후, 미군의 폭격을 받은 그 군함은 5일 동안 계속 불탔어요.
예과 연습생으로서 본토로 건너가다
그 무렵 저는 열다섯 살이 되었는데, 예과 연습생이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군대 일을 하지 말고 감시소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산꼭대기의)감시소에서 19일까지 근무를 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3월 1일에 (이바라키현)쓰치우라 해군 항공대로의 채용 통지가 왔어요. 당시에 저는 맨발에 반바지 차림으로 생활했고, 본토는 춥다는 것도 전혀 몰랐어요.
해군의 트럭을 타고(모토부에서) 나하까지 가서, 그때부터 본토에서 예과 연습생 생활이 시작되었죠. 배로 나가사키의 사세보까지 간 뒤, 기차를 타고 나라로 이동했어요. 예과 연습생 3차 시험은 나라에서 진행되었거든요. 오키나와에서 온 수험자 중 두 사람은 불합격했어요. 저를 포함한 3차 시험 합격자들은, 목적지인 쓰치우라는 공습으로 불타고 있으니 와카야마의 고야산에 있는 절에서 교육 훈련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비행기 조종 훈련은 없었어요. 비행기 보관 장소조차 모르는 상태였죠. 연료도 없었고요. 훈련 3개월째에 분대장에게 “너희들의 임무는 아마 수상 특공일 거다”라는 말을 듣고, 그래서 와카야마 시오노미사키 곶의 해안에서 대기하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민가를 빌려서, 거기서 2개월 정도 수상 특공 명령을 기다렸죠. 그리고 종전을 맞이했습니다. 종전을 맞이한 후, (종전 후에는)잠시 구마모토에 있었어요. 거기서는 굉장히 위험한 일을 했지요. 나가사키의 시마바라에서 석탄 등을 운반하거나, 구마모토의 아마쿠사 부근에서 자재를 가져와서 구마모토의 미나마타에 있는 회사로 옮겼어요. 산에이 해운 주식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그 일을 1년 반 정도 했어요. 그 후에 함께 살던 선배한테 오키나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배와 함께 나가사키의 오무라 수용소로 갔다가 거기서 오키나와로 돌아왔지요.
귀향 후의 생활
돌아와 보니 모토부의 마을은 전부 불타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어요. 사거리에 줄지어 있던 관공서나 경찰서 등도 전부 없어져 있더군요. 지금의 관공서는 예전에 초등학교가 있던 곳인데, 전쟁 때문에 초등학교마저 아예 없어진 상태였어요.
종전 후 2년 이상이 지난 1948년 10월 무렵, 선배들은 가다랑어배 낚시를 하고 있었고 저는 가다랑어 낚시에 쓰는 미끼를 조달했습니다. 하지만 겨울에는 가다랑어 조업을 하지 않았으니까 겨울에는 뭘 먹고 살지 고민을 했어요. 그러던 중 선배들 몇이 통나무배 한 척과 그물을 가지고 왔더군요. 하지만 그 시기에 모토부 반도에서는 물고기는 잡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구니가미촌의 헨토나까지 통나무배를 타고 가서, 헨토나의 ‘하마’라는 마을에 6명이 머물면서 오키나와 자리돔을 잡아서 쌀과 교환한 후에 일주일 정도 걸려 모토부로 돌아왔죠. 그때부터 선배가 근처 마을에서 배를 주문 제작했고, 선배가 책임자가 되어 6명이서 고기잡이를 했어요. 그 무렵 저는 19살이었고, 선배 다섯 명은 모두 30대였어요.
북풍이 불면 나고의 교다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배를 짊어지고 기노자의 가타바루까지 산을 넘으며 서쪽에서 동쪽 해안으로 이동했죠. 일단 기노자의 마쓰다라는 마을에서 숙박을 하면서 일주일 동안 바다를 관찰했어요. 그 다음은 지금의 나고에 있는 헤노코에 머물렀어요. 헤노코의 항구에는 물고기가 잔뜩 있더군요. 헤노코에는 쌀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잡은 물 고기를 짊어지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쌀과 교환했죠. 돈으로는 교환하지 않았어요. 갈 때와 올 때 모두 배와 짐을 메고 이동했어요. 미군의 의료용 자루가 있었는데, 거기에 벼를 70kg 정도 담았죠. 6명이 각각 쌀을 자루에 담아 모토부로 돌아갔어요. 우선 쌀을 짊어지고 교다까지 운반한 뒤, 헤노코로 돌아와 배를 짊어지고 교다까지 왔어요. 마지막으로 헤노코에서 짐을 들고 교다로 돌아오는 식으로 산을 세 번 정도 왕복했죠.
그리고 남풍이 불면 오기미의 시오야만까지 갔어요. 시오야만에서 큰 강을 배로 거슬러 올라간 후, 히가시촌의 가와타까지 배를 메고 갔지요. 가와타에서 고기를 잡고 모토부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어요. 그러던 중 선배들은 통나무배에 엔진을 달 수는 없을지 궁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통나무배에 엔진을 달 거라면, 이에지마에 엔진이 잔뜩 버려져 있었거든요. 때마침 이에지마 출입이 시작된 시기기도 했고요.
이에지마의 LCT 폭발 사고
1948년 8월 6일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연락선을 타고 이에지마로 갔는데, 이에 항의 선창에서 미군 배(LCT: 상륙용 주정) 옆에 제가 탄 배가 도착했어요. 그때 대량의 폭탄을 실은 미군 트럭들이 몰려왔고, 적재 작업 중 대폭발을 일으켜 107명이 죽었습니다. 그 날은 더웠기 때문에 저는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려 해변의 둑길 반대편에 가 있던 덕분에 목숨을 건졌죠. 마침 그 무렵에는 오키나와 본섬 주민들이 이에지마의 전사자 유골을 찾으러 왔고, 이에지마 주민들은 본섬 남부로 가서 전사자의 유골을 찾기 위해 친척들끼리 모여 있던 상황이었어요. 폭발 사고 다음 날, 선배 여섯 명이 통나무배를 타고 저를 데리러 왔어요. 당시에는 이에지마로 가는 연락선은 없었으니까요. 선배들이 왔을 때, 저는 해변을 헤매고 있었어요. 선배들은 제게 무사했냐고 말을 걸어 주었죠. 폭발 때문에 모두 죽었고, 해변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어요. 저는 지금까지 우리 가족한테도 예과 연습생으로 갔던 일이나 이에지마 폭발 사고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전쟁 후의 아기야 고기잡이
구루쿤(농어목 물고기)을 잡을 때는, 요즘 말로 하자면 그물몰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아기야’라고 합니다. 바다 밑에서부터 얕은 곳까지 물고기를 밀어 올리는 것, 그걸 ‘아기야’라고 해요. 추운 겨울에만 가능한 방법입니다. 수온은 17~18도 정도, 팬티도 입지 않고 알몸으로 고기잡이를 하죠. 젖은 팬티를 입고 있으면 더 추우니까요. 6명 모두 팬티도 입지 않은 채 ‘아기야’를 했어요.
먹거리는 풍부했고 쌀도 있었어요. 다른 곳은 고구마도 겨우 구할 수 있을 정도였죠. 그리고 미군에게 지급받은 식량 같은 것도 먹었어요. 고기잡이를 하던 무렵에 저는 2년 동안 심부름꾼으로 지냈어요. 선배들과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났으니까, 아침밥은 제가 지어야 했고 저녁도 마찬가지였어요. 물고기를 팔 때도 짐을 가장 많이 짊어져야 했고요. 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2년 정도 그렇게 살다가 군대 일을 하러 떠났습니다.
군대 일과 ‘전과’
군대 일은 지금의 우루마시의 ‘QM(보급 부대) 덴간’에서 했어요. 월급은
(B엔: 미군의 군표로) 150엔~250엔 정도였죠. 거기서는 모두 ‘전과(戦果)’를 올리기 바빴어요. ‘전과’란 도둑질을 말하는데, 미군의 창고에서 통조림 등을 훔쳐서 이시카와의 암시장에 내다 팔아 돈으로 바꿔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죠. 주로 담요나 미제 바지, 시계 등 여러 가지 물건이 있었어요. 담배 등 온갖 물건을 미군 창고에서 훔친 뒤, 숨겨서 기지 밖으로 빼돌리는 게 힘들었죠. 뭐, 그런 게 군대 일이었어요.
그리고 모터 풀(미군의 차량 기지)에서 일할 때는, 미군의 차량으로 10m 정도 주행하면 곧바로 미국 운전면허를 받을 수 있었어요. 면허증에는 사진이 없었죠. 그래서 저는 오키나와 최초의 버스 운전사 10명 정도의 면허를 대신 따 줬어요. 그 대가로 유부초밥을 하나 받고요. 면허를 따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의뢰인 이름의 알파벳 표기를 확인하고 합격하면 서류에 의뢰인의 이름을 적어서 제출했죠.
잠수부로 활약
나하항에 외국 선박이 입항할 때, 잠수해서 배의 스크루나 빌지 펌프(수중 펌프)의 흡입 등을 점검하는 일을 3년 정도 했어요. 그 일은 특별한 면허가 필요하지 않았죠. 아무튼 스크루에 이상이 없는지, 그런 것들을 점검했어요. 그리고 도쿄대학이나 교토대학, 도카이대학의 교수들이 해양 조사를 위해 자유롭게 오키나와에 올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는 미국의 시정권하였으니까, 어류 조사나 해저 조사의 의뢰가 들어왔어요. 제가 잠수 회사를 만들고 일을 받기로 했죠. 일은 저 혼자 했습니다.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청년들에게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일단 전쟁에 대해서입니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지. 형제 간의 싸움도 전쟁의 일종이죠. 일단 형제끼리 싸움은 절대로 하지 말 것. 그리고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정원에 있는 화분이라도 좋으니까, 파 같은 채소를 키우는 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카무라 히데오 씨는 침몰선 인양 등 해양 구조와 해저 조사 등을 하며 오키나와의 거의 모든 바다에 잠수했습니다. 또한 맨몸 잠수 세계 대회에 일본 대표로 출전해 3위에 입상하는 등,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