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쇼후와 함께 걸어온 나의 인생
다이라 도시코 씨
생년:1920 년
출신지:오기미촌
기조카에서의 어린 시절
태어난 곳은 오기미촌의 기조카입니다. 기조카 사람들은 모두 바쇼후 제작에 종사했죠. 우리 집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부터 바쇼후 진흥에 힘을 쏟았어요. 어머니는 밭에도 가지 않고 계속 바쇼후를 짜곤 했습니다. 저는 베 짜는 소리를 자장가처럼 듣고 자랐고 어릴 때부터 실을 감거나 하면서 어머니 일을 거들었어요. 열 살 때부터 길쌈을 시작했는데, 아직 키가 작아서 발이 베틀에 안 닿았기 때문에 침목을 놓고 베를 짰죠. 파초의 실이 아니라 무명실로 짰어요. 파초의 실은 끊어지기 쉬우니까 무명실로 짠 거죠.
진조 초등학교 5학년 때 제 기모노 옷감을 짤 수 있게 되었고, 친척 언니 것도 만들어 줬어요. 진조 초등학교 고등과 1학년 때 어머니의 비백 무늬 기모노 옷감을 짰습니다. 그리고 고등과 2학년을 거쳐 학교를 졸업한 뒤, 어머니의 바쇼후 제작 일을 돕게 됐죠.
본토 취직 후 귀향하다
그 후 시코쿠와 도쿄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도쿄에서 일하던 무렵, 기조카에 일손이 부족하다며 아버지가 저를 데리러 오셨죠. 바로 짐을 싸서 기조카로 돌아갔어요. 매일 청년단 활동의 일환으로 출정 군인의 가족들을 돌봤습니다. 장작 같은 걸 모았는데, 집안 살림도 제대로 못 할 만큼 바빴어요.
그러는 사이에 1944년이 되었고, 청년 학교 선생님이 저희 집에 찾아와서는, 이미 저를 선택했었는지 오기미촌에서 무조건 30명은 보내야 한다고 해서,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여자 정신대에 가라고 권유하시더군요. 저는 기꺼이 본토의 군수 공장에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3월 30일에 나하항에서 출발했죠. 나고에서 다섯 명, 나키진에서 서른 명, 120명 정도가 동원됐어요. 배는 섬을 따라 통과해 9일째에 가고시마에 도착했죠.
구라시키의 공장으로
그리고 행선지도 모른 채 도착한 곳은 오카야마현의 구라시키였어요. 그날은 4월 20일이었죠. 만발한 벚꽃 아래에서 공장으로 갔습니다. 공장에서는 사장님까지 참가해 사선을 넘어온 오키나와 정신대를 맞이하는 환영회가 열렸죠. 그리고 실습 공장에서는 한 달 동안 실습 훈련을 받았습니다. 망치, 머리띠, 작업복도 배급받았죠. 매일 기숙사에서 공장으로 갈 때 정신대 노래를 부르며 열을 맞춰 행진했어요.
우리는 이런 상황에 오키나와에서 온 거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오키나와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죠. 그때는 오키나와 사람이 목욕한 뒤에는 아무도 그 욕조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오키나와 사람들은 차별을 받고 있었거든요.
종전을 맞이해 직조 기술을 배우다
1945년 6월에 위문 석상에서 공장 소장님이 오키나와의 옥쇄 소식을 알려 주셨어요. 그리고 8월 15일에는 종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죠. 그때 오하라 사장님은 저희에게 의지할 친척이 있는 사람은 나가도 좋고, 여기(방적 공장)에 남아도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200엔에서 300엔이 입금된 적금통장을 저희 모두에게 건네주시더군요. 오키나와 정신대는 해산되었고, 저를 포함한 60명 정도는 공장에 남기로 했어요. 그리고 가동 중인 방적 공장으로 이동하게 됐죠.
그 후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오하라 사장님께서 저를 부르더니 오키나와의 문화를 이 구라시키에 남기고 싶은데 뭔가 방법이 없겠느냐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 저는 도자기 만들기나 염색은 못 하지만, 고향에서 어머니의 바쇼후 제작을 거들었다고 대답했죠. 그러자 사장님은 직물 기술이 있다면 도노무라 씨가 있으니 마침 잘 됐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당시 오하라 사장님은 구라시키 민예관의 관장을 맡고 계셨고 선대부터 계속 구라시키의 민예를 지원해 오셨어요. 그래서 민예 운동을 하던 야나기 무네요시 선생님께 상담을 하셨다고 해요. 오키나와의 문화 재건이라는 취지로, 회사를 재건하기도 벅찬 시기에 사업 계획에 편입시켜서 일본 민예협회의 도노무라 기치노스케 선생님을 회사로 초청하셨죠. 도노무라 선생님에게 조직 직물 등의 기술을 배웠습니다. 직물은 마음이라고, 도노무라 선생님은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죠. 직물에는 자신의 마음이 투영된다고 늘 말씀하시곤 했어요. 기술뿐 아니라 직물에 대한 마음가짐도 배운 거죠.
오카야마에서 철수
1946년에 오키나와로 귀환하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많이 고민했어요. 회사에서 여러모로 준비를 많이 해 줘서 저희는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면서 봉급은 물론 식사도 제공받으며 독신자 기숙사에서 불편함 없이 생활해 왔는데,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게 너무 죄송스러웠거든요. 공장과 오카야마 부근에 사는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구라시키역까지 저희를 배웅하러 왔어요. 오하라 사장님과 도노무라 선생님, 과장님과 회사 간부님들도 계셨죠. 저희가 출발할 때 그 분들은 오키나와에 돌아가서도 바쇼후라는 오키나와의 직물을 지키고 육성해 달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씀하시더군요. 그 말을 듣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몇 번이고 인사를 하고 다른 분들과 작별했어요. 히로시마의 우지나항에서 배를 탔어요. 그리고 구바사키에 상륙했습니다.
나하에 도착해 보니 온통 잿더미가 되어 있더군요. 곳곳에 텐트로 만든 오두막이 있었어요. 트럭을 타고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갔죠.
고향 기조카로
그 도중에 본 오키나와의 경치는 푸른 바다와 산의 녹음이 너무 정겨웠는데, 기조카로 돌아와 보니 해안의 모습이 완전히 변해 있었어요. 텐트와 초가집이 잔뜩 늘어서 있더군요. 마을 내의 집들은 대부분 불타 버린 상태였어요. 우리 집에 도착하자마자 불단에 합장을 하려고 했는데 위패를 보니 뭔가 이상하더라고요. 원래 있던 위패가 아니라 낡은 위패로 바뀌어 있었어요. 저희 집에는 당나라식(중국식)의 큰 위패가 있었거든요. 그 위패에 대해 가족들에게 물어 봤더니, 기조카 초등학교에 미군이 주둔했는데 미군 대장의 방에 그 위패가 장식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난간이나 도코노마의 장식과 덧문 같은 집안의 여러 가지 물건들이 전쟁통의 혼란 속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희 집은 1941년에 재건축을 했기 때문에 덧문 같은 것도 전부 새것이었을 텐데, 새 덧문은 없어지고 낡은 덧문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창고를 봤더니 귀한 칠기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요.
종전 후의 바쇼후 부흥
그 무렵 마을 사람들은 군대 일을 하고 있었어요. 월요일에 미군 트럭을 타고 나갔다가 토요일에 돌아오는 생활을 했죠. 마을 안의 파초 밭은 모두 없어졌어요. 말라리아를 퍼트리는 모기의 발생원이라는 이유로 미군이 다 태워 버렸다더군요. 그래도 파초는 금세 싹을 틔우기에 부지 내에 파초가 막 자라기 시작할 때였죠. 그 무렵에는 큰 밭도 없어서 아직 바쇼후는 못 짰어요. 대신 텐트나 장갑, 양말의 실을 풀어서 그 실로 옷감을 짰죠.
각 가정에 직물을 짜는 기계나 도구는 남아 있었어요. 저희 집에 있던 건 숙모님이 쓰시곤 했죠. 창고에는 베 짜는 도구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저희 집에서는 누에를 많이 키웠기에 천장에는 명주실 같은 게 놓여 있었죠. 어머니가 그걸 꺼내서 풀솜으로 실을 만들어 옷감을 짰어요. 무늬가 없으면 별로인 것 같아서 교토식으로 염색하거나 후쿠기로 색을 냈죠.
바쇼후 제작의 부흥과 도전
태풍 때문에 종광이라는 도구가 물에 잠겨 버려서, 저는 어떻게든 종광을 만들어 보려고 했어요. 숙모도 종광을 만드는 법은 몰랐지만 도구 자체는 갖고 있었기에 그걸 제게 물려주셨죠. 그걸 참고해서 직접 종광을 만들었어요. 또 바디라는 도구가 있는데, 오래 된 바디도 전부 꺼냈습니다. 그 외에도 북이나 최활 같은 길쌈 도구가 있죠. 최활은 돼지뼈를 가공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궁리를 해서 도구를 제작했습니다. 바쇼후 제작에 도전하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에요.
저는 바쇼후를 만들 줄은 알았지만 베테랑 분들한테는 아예 상대가 안 됐거든요. 그래도 어쨌든 바쇼후를 전시회에 출품해 보기로 했어요. 어떻게든 바쇼후 제작에 활용하고 싶다는 생각에 어머니가 갖고 있던 실을 다정큼나무라는 식물로 염색해서 쓰기도 하고, 여러모로 새로운 제조법에 도전해 봤죠. 어머니가 갖고 있던 실만으로는 부족해서, 기조카에서 가까운 노하 마을에는 파초 실이 많았기에 거기다가 부탁을 해서 실을 제공받기로 했어요. 질이 좋은 실은 바쇼후를 짜는 데 썼고 질이 나쁜 실은 제 옷을 만드는 데 썼죠. 하여튼 그렇게 실을 사들였어요. 그때는 무지의 원단도 B엔(미군 군표)으로 600엔이던 시절이었죠. 하지만 실은 한 벌 분량에 200엔도 안 됐어요. 그렇게 모은 파초 실로 남성용의 굵은 오비(허리띠)를 만들었죠. 그걸 처음에 만들고, 그리고 남은 실로는 꽃병 받침을 만들었어요. 다른 기조카 사람들한테도 이걸 만들게 해서 널리 보급시켰죠. 오비를 만들고 남은 천으로 포렴을 만들거나 편지꽂이도 만들었어요. 그게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더군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어 공항 매점에서 선물로 판매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구니가미손 오쿠마에는 미군이 있었고 가데나 기지에서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저는 기조카 사람들한테도 일을 부탁했어요. 작업 시간 기준 같은 걸 제 나름대로 계산해서 사람들한테 품삯을 지불했죠. 바쇼후는 중개인에게 파는 것보다 10~20% 비싸게 팔도록 했어요. 실제로 매물로 내놓을 때 값을 매기는 법도 배웠고요. 자릿세라든가 그런 것도 포함해서 바쇼후를 제작하는 사람들에게 가급적 품삯을 넉넉히 줄 수 있도록 교섭했습니다.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요즘 청년들은 자기 일만 생각하기보다는, 학력도 있고 지식도 풍부하고 또 모든 면에서 환경이 잘 갖춰져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세상을 위해서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까, 다음 세대로 전해 줄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네요.
1974년에 ‘기조카 바쇼후’가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후 다이라 도시코 씨는 ‘기조카 바쇼후 보존회’의 회장으로 취임해 바쇼후의 진흥과 후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2000년에 다이라 도시코 씨는 국가 지정 중요 무형문화재 ‘바쇼후’ 보유자(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기조카에서의 어린 시절
태어난 곳은 오기미촌의 기조카입니다. 기조카 사람들은 모두 바쇼후 제작에 종사했죠. 우리 집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부터 바쇼후 진흥에 힘을 쏟았어요. 어머니는 밭에도 가지 않고 계속 바쇼후를 짜곤 했습니다. 저는 베 짜는 소리를 자장가처럼 듣고 자랐고 어릴 때부터 실을 감거나 하면서 어머니 일을 거들었어요. 열 살 때부터 길쌈을 시작했는데, 아직 키가 작아서 발이 베틀에 안 닿았기 때문에 침목을 놓고 베를 짰죠. 파초의 실이 아니라 무명실로 짰어요. 파초의 실은 끊어지기 쉬우니까 무명실로 짠 거죠.
진조 초등학교 5학년 때 제 기모노 옷감을 짤 수 있게 되었고, 친척 언니 것도 만들어 줬어요. 진조 초등학교 고등과 1학년 때 어머니의 비백 무늬 기모노 옷감을 짰습니다. 그리고 고등과 2학년을 거쳐 학교를 졸업한 뒤, 어머니의 바쇼후 제작 일을 돕게 됐죠.
본토 취직 후 귀향하다
그 후 시코쿠와 도쿄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도쿄에서 일하던 무렵, 기조카에 일손이 부족하다며 아버지가 저를 데리러 오셨죠. 바로 짐을 싸서 기조카로 돌아갔어요. 매일 청년단 활동의 일환으로 출정 군인의 가족들을 돌봤습니다. 장작 같은 걸 모았는데, 집안 살림도 제대로 못 할 만큼 바빴어요.
그러는 사이에 1944년이 되었고, 청년 학교 선생님이 저희 집에 찾아와서는, 이미 저를 선택했었는지 오기미촌에서 무조건 30명은 보내야 한다고 해서,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여자 정신대에 가라고 권유하시더군요. 저는 기꺼이 본토의 군수 공장에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3월 30일에 나하항에서 출발했죠. 나고에서 다섯 명, 나키진에서 서른 명, 120명 정도가 동원됐어요. 배는 섬을 따라 통과해 9일째에 가고시마에 도착했죠.
구라시키의 공장으로
그리고 행선지도 모른 채 도착한 곳은 오카야마현의 구라시키였어요. 그날은 4월 20일이었죠. 만발한 벚꽃 아래에서 공장으로 갔습니다. 공장에서는 사장님까지 참가해 사선을 넘어온 오키나와 정신대를 맞이하는 환영회가 열렸죠. 그리고 실습 공장에서는 한 달 동안 실습 훈련을 받았습니다. 망치, 머리띠, 작업복도 배급받았죠. 매일 기숙사에서 공장으로 갈 때 정신대 노래를 부르며 열을 맞춰 행진했어요.
우리는 이런 상황에 오키나와에서 온 거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오키나와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죠. 그때는 오키나와 사람이 목욕한 뒤에는 아무도 그 욕조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오키나와 사람들은 차별을 받고 있었거든요.
종전을 맞이해 직조 기술을 배우다
1945년 6월에 위문 석상에서 공장 소장님이 오키나와의 옥쇄 소식을 알려 주셨어요. 그리고 8월 15일에는 종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죠. 그때 오하라 사장님은 저희에게 의지할 친척이 있는 사람은 나가도 좋고, 여기(방적 공장)에 남아도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200엔에서 300엔이 입금된 적금통장을 저희 모두에게 건네주시더군요. 오키나와 정신대는 해산되었고, 저를 포함한 60명 정도는 공장에 남기로 했어요. 그리고 가동 중인 방적 공장으로 이동하게 됐죠.
그 후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오하라 사장님께서 저를 부르더니 오키나와의 문화를 이 구라시키에 남기고 싶은데 뭔가 방법이 없겠느냐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 저는 도자기 만들기나 염색은 못 하지만, 고향에서 어머니의 바쇼후 제작을 거들었다고 대답했죠. 그러자 사장님은 직물 기술이 있다면 도노무라 씨가 있으니 마침 잘 됐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당시 오하라 사장님은 구라시키 민예관의 관장을 맡고 계셨고 선대부터 계속 구라시키의 민예를 지원해 오셨어요. 그래서 민예 운동을 하던 야나기 무네요시 선생님께 상담을 하셨다고 해요. 오키나와의 문화 재건이라는 취지로, 회사를 재건하기도 벅찬 시기에 사업 계획에 편입시켜서 일본 민예협회의 도노무라 기치노스케 선생님을 회사로 초청하셨죠. 도노무라 선생님에게 조직 직물 등의 기술을 배웠습니다. 직물은 마음이라고, 도노무라 선생님은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죠. 직물에는 자신의 마음이 투영된다고 늘 말씀하시곤 했어요. 기술뿐 아니라 직물에 대한 마음가짐도 배운 거죠.
오카야마에서 철수
1946년에 오키나와로 귀환하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많이 고민했어요. 회사에서 여러모로 준비를 많이 해 줘서 저희는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면서 봉급은 물론 식사도 제공받으며 독신자 기숙사에서 불편함 없이 생활해 왔는데,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게 너무 죄송스러웠거든요. 공장과 오카야마 부근에 사는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구라시키역까지 저희를 배웅하러 왔어요. 오하라 사장님과 도노무라 선생님, 과장님과 회사 간부님들도 계셨죠. 저희가 출발할 때 그 분들은 오키나와에 돌아가서도 바쇼후라는 오키나와의 직물을 지키고 육성해 달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씀하시더군요. 그 말을 듣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몇 번이고 인사를 하고 다른 분들과 작별했어요. 히로시마의 우지나항에서 배를 탔어요. 그리고 구바사키에 상륙했습니다.
나하에 도착해 보니 온통 잿더미가 되어 있더군요. 곳곳에 텐트로 만든 오두막이 있었어요. 트럭을 타고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갔죠.
고향 기조카로
그 도중에 본 오키나와의 경치는 푸른 바다와 산의 녹음이 너무 정겨웠는데, 기조카로 돌아와 보니 해안의 모습이 완전히 변해 있었어요. 텐트와 초가집이 잔뜩 늘어서 있더군요. 마을 내의 집들은 대부분 불타 버린 상태였어요. 우리 집에 도착하자마자 불단에 합장을 하려고 했는데 위패를 보니 뭔가 이상하더라고요. 원래 있던 위패가 아니라 낡은 위패로 바뀌어 있었어요. 저희 집에는 당나라식(중국식)의 큰 위패가 있었거든요. 그 위패에 대해 가족들에게 물어 봤더니, 기조카 초등학교에 미군이 주둔했는데 미군 대장의 방에 그 위패가 장식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난간이나 도코노마의 장식과 덧문 같은 집안의 여러 가지 물건들이 전쟁통의 혼란 속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희 집은 1941년에 재건축을 했기 때문에 덧문 같은 것도 전부 새것이었을 텐데, 새 덧문은 없어지고 낡은 덧문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창고를 봤더니 귀한 칠기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요.
종전 후의 바쇼후 부흥
그 무렵 마을 사람들은 군대 일을 하고 있었어요. 월요일에 미군 트럭을 타고 나갔다가 토요일에 돌아오는 생활을 했죠. 마을 안의 파초 밭은 모두 없어졌어요. 말라리아를 퍼트리는 모기의 발생원이라는 이유로 미군이 다 태워 버렸다더군요. 그래도 파초는 금세 싹을 틔우기에 부지 내에 파초가 막 자라기 시작할 때였죠. 그 무렵에는 큰 밭도 없어서 아직 바쇼후는 못 짰어요. 대신 텐트나 장갑, 양말의 실을 풀어서 그 실로 옷감을 짰죠.
각 가정에 직물을 짜는 기계나 도구는 남아 있었어요. 저희 집에 있던 건 숙모님이 쓰시곤 했죠. 창고에는 베 짜는 도구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저희 집에서는 누에를 많이 키웠기에 천장에는 명주실 같은 게 놓여 있었죠. 어머니가 그걸 꺼내서 풀솜으로 실을 만들어 옷감을 짰어요. 무늬가 없으면 별로인 것 같아서 교토식으로 염색하거나 후쿠기로 색을 냈죠.
바쇼후 제작의 부흥과 도전
태풍 때문에 종광이라는 도구가 물에 잠겨 버려서, 저는 어떻게든 종광을 만들어 보려고 했어요. 숙모도 종광을 만드는 법은 몰랐지만 도구 자체는 갖고 있었기에 그걸 제게 물려주셨죠. 그걸 참고해서 직접 종광을 만들었어요. 또 바디라는 도구가 있는데, 오래 된 바디도 전부 꺼냈습니다. 그 외에도 북이나 최활 같은 길쌈 도구가 있죠. 최활은 돼지뼈를 가공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궁리를 해서 도구를 제작했습니다. 바쇼후 제작에 도전하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에요.
저는 바쇼후를 만들 줄은 알았지만 베테랑 분들한테는 아예 상대가 안 됐거든요. 그래도 어쨌든 바쇼후를 전시회에 출품해 보기로 했어요. 어떻게든 바쇼후 제작에 활용하고 싶다는 생각에 어머니가 갖고 있던 실을 다정큼나무라는 식물로 염색해서 쓰기도 하고, 여러모로 새로운 제조법에 도전해 봤죠. 어머니가 갖고 있던 실만으로는 부족해서, 기조카에서 가까운 노하 마을에는 파초 실이 많았기에 거기다가 부탁을 해서 실을 제공받기로 했어요. 질이 좋은 실은 바쇼후를 짜는 데 썼고 질이 나쁜 실은 제 옷을 만드는 데 썼죠. 하여튼 그렇게 실을 사들였어요. 그때는 무지의 원단도 B엔(미군 군표)으로 600엔이던 시절이었죠. 하지만 실은 한 벌 분량에 200엔도 안 됐어요. 그렇게 모은 파초 실로 남성용의 굵은 오비(허리띠)를 만들었죠. 그걸 처음에 만들고, 그리고 남은 실로는 꽃병 받침을 만들었어요. 다른 기조카 사람들한테도 이걸 만들게 해서 널리 보급시켰죠. 오비를 만들고 남은 천으로 포렴을 만들거나 편지꽂이도 만들었어요. 그게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더군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어 공항 매점에서 선물로 판매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구니가미손 오쿠마에는 미군이 있었고 가데나 기지에서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저는 기조카 사람들한테도 일을 부탁했어요. 작업 시간 기준 같은 걸 제 나름대로 계산해서 사람들한테 품삯을 지불했죠. 바쇼후는 중개인에게 파는 것보다 10~20% 비싸게 팔도록 했어요. 실제로 매물로 내놓을 때 값을 매기는 법도 배웠고요. 자릿세라든가 그런 것도 포함해서 바쇼후를 제작하는 사람들에게 가급적 품삯을 넉넉히 줄 수 있도록 교섭했습니다.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요즘 청년들은 자기 일만 생각하기보다는, 학력도 있고 지식도 풍부하고 또 모든 면에서 환경이 잘 갖춰져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세상을 위해서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까, 다음 세대로 전해 줄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네요.
1974년에 ‘기조카 바쇼후’가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후 다이라 도시코 씨는 ‘기조카 바쇼후 보존회’의 회장으로 취임해 바쇼후의 진흥과 후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2000년에 다이라 도시코 씨는 국가 지정 중요 무형문화재 ‘바쇼후’ 보유자(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