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학교 재건
이하 간유 씨
생년:1928 년
출신지:요미탄촌
자키미성의 군 시설
1944년, 자키미성의 정상에 일본군 고사포가 6문 설치되었습니다. 오키나와 현립 농림학교 학생들만 모여 나무 벌채 작업을 했죠. 매일 가데나에 있는 학교에서 요미탄의 자키미성까지 다녔어요. 이것이 농림학교 학생의 주요 일과인 진지 구축이었죠. 그 밖에도 요미탄촌 도야의 해안에 전차 벙커라고 해서, 바다에서 상륙하는 전차를 막기 위해 돌담을 쌓고 그 뒤에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 전차를 떨어트리기 위한 전차 벙커를 만들기도 했고요. 당시에는 나카 비행장이라고 불리던 현재 가데나 비행장의 활주로 조성 작업도 했습니다. 우리는 농림학교에 입학한 뒤 1년 동안은 수업을 들었죠. 2학년으로 진급하자마자 공부를 할 상황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학교 건물에는 야마 부대(제24사단)가 주둔했고 학생인 우리는 오늘은 나카 비행장으로, 오늘은 요미탄의 전차 벙커를 파러, 오늘은 해군 벙커, 이런 식으로 매일 진지 구축 작업에 쫓기며 1년을 보냈죠.
요미탄손 후루겐 마을에는 야마 부대의 의료반이 배치되었고, 위생병들이 널찍한 다다미방이 있는 저택에 주둔해 있었어요. 우리 집에도 14~15명의 군인들이 있었죠. (오키나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요미탄촌 주민은 구니가미촌의 히지라는 마을로 대피하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구니가미촌 히지에서
(오키나와 전투가 시작되자)농림학교 학생들은 학교에 집결해 일본군을 도왔어요. 하지만 저는 후루겐의 자택에 동생들과 가족이 있었기에, 같은 마을의 동급생 3명과 상의해서 얀바루(본섬 북부)로 가족과 함께 대피했죠. 그 후로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요미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됐어요. 피난처 히지에서 처음에는 쌀 배급이 조금은 있었지만, 그 배급도 없어져서 야산의 풀을 뜯어먹곤 했죠. 식량이 없어서 고생을 하느니 요미탄으로 돌아가기로 되어서, 산을 타고 나카가미 방면으로 걸어갔어요. 구시촌(현재의 나고시)의 오카와까지 가족들이랑 다 같이 왔더니 오카와에도 미군들이 매일 아침 지프로 왕래하고 있더군요. 젊은 남자는 바로 총으로 사살당한다고, 당시에는 그렇게 들었기에 저와 친구 세 명은 가족과 헤어져 가족을 그대로 오카와에 남겨두고 산속으로 도망쳤어요.
(오키나와 전투 시작 후)우리 세 명은 일본군을 돕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 이긴 뒤에 보복을 당할지도 모르니, 어떻게든 일본군과 협력해서 싸우기로 했죠. 모토부에 우도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기에, 이 우도 부대에 부탁해 편입을 해서 군과 함께 행동하려고 생각해서 부대를 찾아다녔어요. 하지만 부대를 못 찾았고, 오카와의 산속에서 고구마를 먹으려고 강변에서 고구마를 굽던 중에 갑자기 미군이 나타나 우리 셋의 등에 총구를 들이밀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을 들었고, 둑 위에서 제압된 뒤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이 7월 4일이었더군요. 7월까지 도망다녔기 때문에 다행히 즉시 사살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그 자리에서 포로가 되어 그날 바로 헤노코의 수용소에 들어가게 됐죠.
포로가 되어 헤노코 수용소로
거기는 먼저 붙잡힌 친구나 선배들을 포함해 200~300명 정도가 수용되어 있었어요. 들판에 텐트만 쳐서 만든 수용소였죠. 주위에는 철망이 둘러져 있었어요. 헤노코에는 젊은 사람들만 수용되었죠. 군적이 있는 사람은 긴정의 야가 포로수용소로 연행되었고요. 수용 첫날에는 계속 심문만 받았죠. 일본군이냐고 묻기에 저는 평범한 학생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현지 구장의 이름을 말해 보라는 등 여러 가지 질문을 한 뒤에, 군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헤노코 수용소에 남게 되었습니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은 작업에 동원되었어요. 주로 헤노코 수용소 근처의 도로를 확장하는 작업이 많았죠. 근처의 구시에 큰 병원이 생겼는데, 사실 이름만 병원이지 텐트를 치고 미군의 야전용 병상을 늘어놓기만 한 병원이에요. 그 텐트에는 시마지리에서 부상당한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수백 명의 부상자들이 있었어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 있었죠. 포로들은 그 병원의 청소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어요. 저는 서너 번 정도 그 작업을 했죠. 시신을 구덩이에 묻는 작업은 구덩이 작업반이라고 불렸어요. 병원 근처에 구덩이를 파는 작업을 포로들이 했죠. 한 구덩이에 네다섯 구의 시신을 묻었어요. 딱한 일이긴 합니다만, 그때는 감각이 마비되어 있어서 불쌍하다는 생각도 별로 안 들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요미탄으로
전쟁 전의 가데나 농림학교 학생 대부분이 (종전 후)나고의 북부 농림 고등학교에 모였기 때문에 저도 갔어요. 거기서 1년을 보내고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요미탄촌의 오키라는 곳에 가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저도 거기 살게 됐어요. 고향 후루겐에는 미군 가족 부대가 있었는데, 거기서 가든 보이로 2년 정도 일했습니다. 그곳에는 조립식 막사가 50동 정도 있었고, 한 막사에 두 가구씩 살고 있었어요.
군 시설에서 일하다
일의 내용은 막사 주위에 간단한 정원을 꾸미고 화초를 심거나 막사 주변을 청소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당시에는)다른 일이 없었기에 저는 이 가든 보이라는 일을 하고 있었죠. 당시에 우리 집은 7인 가족이었어요. 어머니와 장남인 저, 남동생 둘과 여동생이 셋 있었죠. 가든 보이는 월급이 적어서, 그걸로는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요미탄 비행장 서쪽에 미군 부대가 있었기에, 그 부대 식당의 취사반에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그 부대의 취사반에 취직한 뒤로는 부대에서 음식 같은 걸 얻을 수 있었어요. 가족들은 저녁 준비를 하지 않아도 부대에서 가져오는 빵이나 과일 같은 걸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죠. 그래서 생활에 여유가 좀 생기게 되었습니다. 미군들이 먹다 남은 잔반 같은 걸 모아 와서 돼지를 키우는 사람들한테 팔아 돈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만, 부대에서 멋대로 물자를 훔치진 않았어요. 2년 정도 그 미군 부대에 근무했죠.
모교의 교원이 되다
모교인 후루겐 초등학교가 재건되었는데 교원이 부족했어요. 월급이 많은 군 고용원으로 일하려고 학교를 그만두거나 전사해 버린 경우가 많아 교원이 항상 부족했습니다. 특히 남자 교원이 적었어요. 초등학교는 재건했는데 교원들은 계속 일을 그만두니 교장 선생님은 골머리를 앓았죠. 그래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저한테, 고등학교만 나오면 교원 일은 할 수 있으니까 부디 학교에 와서 아이들을 지도해 달라며, 교장 선생님께서 저를 계속 설득했어요. 1950년 1월부터 저는 임시 교원으로서 후루겐 초등학교에 근무하게 됐죠.
종전 후의 학교 교육
거기는 원래 학교 부지가 아니라 들판에 텐트를 세운 간단한 교사였고, 운동장도 돌멩이투성이인 황폐한 땅이었어요. 재건 초기에는 돌을 깨트리고 땅을 고르는 등 학습 환경 조성이 중심이었죠. 수업은 오전에만 하고 아이들이 하교하면 학습 환경 정비 업무를 했어요. 텐트로 만든 교사는 햇볕이 내리쬐면 몹시 더웠기 때문에,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짚을 베어다 주면 아이들이 집에 돌아간 뒤 교직원들이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매일같이 교사 조성 작업을 계속했어요. 학부모들 소유의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 교사를 열 동 정도 지었죠. 한 동에 두 학급씩 들어가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노트도 없었고 미군 쓰레기장에서 모은 종이로 각자 노트 같은 걸 만들어서 그걸 썼죠. 연필은 미군에게 받아 쓰거나 미군 쓰레기장에서 주웠어요. 교과서도 처음에는 없었기 때문에 교원이 등사판으로 교과서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 줬죠. 처음에는 그걸 교과서 삼아 공부했지만, 나중에는 교과서도 배부되어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됐어요. 그것도 4~5년 뒤의 일이었죠. 책상이나 의자는 미군의 야전용 침대를 썼습니다. 위에 판자를 나란히 박고 책상 하나를 두세 명이 쓰는 식으로, 직접 고안해 만든 책상과 의자를 썼죠. 얼마 후 마을에서 2인용 책상을 마련해 주더군요.
임시 교원은 목수 일은 물론 괭이나 곡괭이로 돌을 캐내거나 땅을 고르는 일까지 했는데, 교원이란 건 이름뿐이었고 학습 환경 조성 작업이 대부분이었어요. 사실 그래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남자를 원했던 게 아닐까요? 그래도 아이들은 귀여웠고 당시의 아이들은 정말 순수했어요. 아이들이 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도 교원들의 지도에 따라 해냈죠. 아이들과 교원들이 하나가 되어서 환경 정비 같은 일들을 수월히 진행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교원 연수소가 고자 고등학교 내에 생겼죠. 거기서 반년 동안 훈련을 받으면 교사가 될 수 있었어요. 제일 힘들었던 건 토요일과 일요일 강습이었죠. 약 반년 동안 토요일 오후, 일요일은 종일반으로 슈리의 류큐 대학에 다녔습니다. 다양한 교육을 받고 아이들을 돌보거나 수업을 담당했죠. 그 외에도 종종 학점을 딸 수 있는 연수회가 열렸어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연수회장으로 달려가 두세 시간 정도 강의를 듣는, 그런 방식의 연수회였죠.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종전 후)우리는 서로 돕고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친척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부흥을 위해 노력했어요. 종전 직후의 주민들은 모두 대단한 분들이죠. 지금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돕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현재의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대가 이렇게 존재하는 건 여러분의 선배님들이 노력한 덕분에 지금과 같은 멋진 세상이 만들어진 거니까, 여러분도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지금보다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줬으면 합니다.
이하 간유 씨는 모교의 임시 교원으로 시작해 약 40년간 학교 교육에 종사했습니다. 퇴직 후에는 인권 옹호 위원으로서 지역의 인권 옹호 추진에 공헌했습니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1998년에 법무대신 표창, 2012년에는 서보 쌍광장을 수상했습니다.
자키미성의 군 시설
1944년, 자키미성의 정상에 일본군 고사포가 6문 설치되었습니다. 오키나와 현립 농림학교 학생들만 모여 나무 벌채 작업을 했죠. 매일 가데나에 있는 학교에서 요미탄의 자키미성까지 다녔어요. 이것이 농림학교 학생의 주요 일과인 진지 구축이었죠. 그 밖에도 요미탄촌 도야의 해안에 전차 벙커라고 해서, 바다에서 상륙하는 전차를 막기 위해 돌담을 쌓고 그 뒤에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 전차를 떨어트리기 위한 전차 벙커를 만들기도 했고요. 당시에는 나카 비행장이라고 불리던 현재 가데나 비행장의 활주로 조성 작업도 했습니다. 우리는 농림학교에 입학한 뒤 1년 동안은 수업을 들었죠. 2학년으로 진급하자마자 공부를 할 상황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학교 건물에는 야마 부대(제24사단)가 주둔했고 학생인 우리는 오늘은 나카 비행장으로, 오늘은 요미탄의 전차 벙커를 파러, 오늘은 해군 벙커, 이런 식으로 매일 진지 구축 작업에 쫓기며 1년을 보냈죠.
요미탄손 후루겐 마을에는 야마 부대의 의료반이 배치되었고, 위생병들이 널찍한 다다미방이 있는 저택에 주둔해 있었어요. 우리 집에도 14~15명의 군인들이 있었죠. (오키나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요미탄촌 주민은 구니가미촌의 히지라는 마을로 대피하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구니가미촌 히지에서
(오키나와 전투가 시작되자)농림학교 학생들은 학교에 집결해 일본군을 도왔어요. 하지만 저는 후루겐의 자택에 동생들과 가족이 있었기에, 같은 마을의 동급생 3명과 상의해서 얀바루(본섬 북부)로 가족과 함께 대피했죠. 그 후로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요미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됐어요. 피난처 히지에서 처음에는 쌀 배급이 조금은 있었지만, 그 배급도 없어져서 야산의 풀을 뜯어먹곤 했죠. 식량이 없어서 고생을 하느니 요미탄으로 돌아가기로 되어서, 산을 타고 나카가미 방면으로 걸어갔어요. 구시촌(현재의 나고시)의 오카와까지 가족들이랑 다 같이 왔더니 오카와에도 미군들이 매일 아침 지프로 왕래하고 있더군요. 젊은 남자는 바로 총으로 사살당한다고, 당시에는 그렇게 들었기에 저와 친구 세 명은 가족과 헤어져 가족을 그대로 오카와에 남겨두고 산속으로 도망쳤어요.
(오키나와 전투 시작 후)우리 세 명은 일본군을 돕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 이긴 뒤에 보복을 당할지도 모르니, 어떻게든 일본군과 협력해서 싸우기로 했죠. 모토부에 우도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기에, 이 우도 부대에 부탁해 편입을 해서 군과 함께 행동하려고 생각해서 부대를 찾아다녔어요. 하지만 부대를 못 찾았고, 오카와의 산속에서 고구마를 먹으려고 강변에서 고구마를 굽던 중에 갑자기 미군이 나타나 우리 셋의 등에 총구를 들이밀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을 들었고, 둑 위에서 제압된 뒤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이 7월 4일이었더군요. 7월까지 도망다녔기 때문에 다행히 즉시 사살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그 자리에서 포로가 되어 그날 바로 헤노코의 수용소에 들어가게 됐죠.
포로가 되어 헤노코 수용소로
거기는 먼저 붙잡힌 친구나 선배들을 포함해 200~300명 정도가 수용되어 있었어요. 들판에 텐트만 쳐서 만든 수용소였죠. 주위에는 철망이 둘러져 있었어요. 헤노코에는 젊은 사람들만 수용되었죠. 군적이 있는 사람은 긴정의 야가 포로수용소로 연행되었고요. 수용 첫날에는 계속 심문만 받았죠. 일본군이냐고 묻기에 저는 평범한 학생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현지 구장의 이름을 말해 보라는 등 여러 가지 질문을 한 뒤에, 군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헤노코 수용소에 남게 되었습니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은 작업에 동원되었어요. 주로 헤노코 수용소 근처의 도로를 확장하는 작업이 많았죠. 근처의 구시에 큰 병원이 생겼는데, 사실 이름만 병원이지 텐트를 치고 미군의 야전용 병상을 늘어놓기만 한 병원이에요. 그 텐트에는 시마지리에서 부상당한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수백 명의 부상자들이 있었어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 있었죠. 포로들은 그 병원의 청소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어요. 저는 서너 번 정도 그 작업을 했죠. 시신을 구덩이에 묻는 작업은 구덩이 작업반이라고 불렸어요. 병원 근처에 구덩이를 파는 작업을 포로들이 했죠. 한 구덩이에 네다섯 구의 시신을 묻었어요. 딱한 일이긴 합니다만, 그때는 감각이 마비되어 있어서 불쌍하다는 생각도 별로 안 들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요미탄으로
전쟁 전의 가데나 농림학교 학생 대부분이 (종전 후)나고의 북부 농림 고등학교에 모였기 때문에 저도 갔어요. 거기서 1년을 보내고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요미탄촌의 오키라는 곳에 가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저도 거기 살게 됐어요. 고향 후루겐에는 미군 가족 부대가 있었는데, 거기서 가든 보이로 2년 정도 일했습니다. 그곳에는 조립식 막사가 50동 정도 있었고, 한 막사에 두 가구씩 살고 있었어요.
군 시설에서 일하다
일의 내용은 막사 주위에 간단한 정원을 꾸미고 화초를 심거나 막사 주변을 청소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당시에는)다른 일이 없었기에 저는 이 가든 보이라는 일을 하고 있었죠. 당시에 우리 집은 7인 가족이었어요. 어머니와 장남인 저, 남동생 둘과 여동생이 셋 있었죠. 가든 보이는 월급이 적어서, 그걸로는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요미탄 비행장 서쪽에 미군 부대가 있었기에, 그 부대 식당의 취사반에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그 부대의 취사반에 취직한 뒤로는 부대에서 음식 같은 걸 얻을 수 있었어요. 가족들은 저녁 준비를 하지 않아도 부대에서 가져오는 빵이나 과일 같은 걸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죠. 그래서 생활에 여유가 좀 생기게 되었습니다. 미군들이 먹다 남은 잔반 같은 걸 모아 와서 돼지를 키우는 사람들한테 팔아 돈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만, 부대에서 멋대로 물자를 훔치진 않았어요. 2년 정도 그 미군 부대에 근무했죠.
모교의 교원이 되다
모교인 후루겐 초등학교가 재건되었는데 교원이 부족했어요. 월급이 많은 군 고용원으로 일하려고 학교를 그만두거나 전사해 버린 경우가 많아 교원이 항상 부족했습니다. 특히 남자 교원이 적었어요. 초등학교는 재건했는데 교원들은 계속 일을 그만두니 교장 선생님은 골머리를 앓았죠. 그래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저한테, 고등학교만 나오면 교원 일은 할 수 있으니까 부디 학교에 와서 아이들을 지도해 달라며, 교장 선생님께서 저를 계속 설득했어요. 1950년 1월부터 저는 임시 교원으로서 후루겐 초등학교에 근무하게 됐죠.
종전 후의 학교 교육
거기는 원래 학교 부지가 아니라 들판에 텐트를 세운 간단한 교사였고, 운동장도 돌멩이투성이인 황폐한 땅이었어요. 재건 초기에는 돌을 깨트리고 땅을 고르는 등 학습 환경 조성이 중심이었죠. 수업은 오전에만 하고 아이들이 하교하면 학습 환경 정비 업무를 했어요. 텐트로 만든 교사는 햇볕이 내리쬐면 몹시 더웠기 때문에,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짚을 베어다 주면 아이들이 집에 돌아간 뒤 교직원들이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매일같이 교사 조성 작업을 계속했어요. 학부모들 소유의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 교사를 열 동 정도 지었죠. 한 동에 두 학급씩 들어가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노트도 없었고 미군 쓰레기장에서 모은 종이로 각자 노트 같은 걸 만들어서 그걸 썼죠. 연필은 미군에게 받아 쓰거나 미군 쓰레기장에서 주웠어요. 교과서도 처음에는 없었기 때문에 교원이 등사판으로 교과서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 줬죠. 처음에는 그걸 교과서 삼아 공부했지만, 나중에는 교과서도 배부되어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됐어요. 그것도 4~5년 뒤의 일이었죠. 책상이나 의자는 미군의 야전용 침대를 썼습니다. 위에 판자를 나란히 박고 책상 하나를 두세 명이 쓰는 식으로, 직접 고안해 만든 책상과 의자를 썼죠. 얼마 후 마을에서 2인용 책상을 마련해 주더군요.
임시 교원은 목수 일은 물론 괭이나 곡괭이로 돌을 캐내거나 땅을 고르는 일까지 했는데, 교원이란 건 이름뿐이었고 학습 환경 조성 작업이 대부분이었어요. 사실 그래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남자를 원했던 게 아닐까요? 그래도 아이들은 귀여웠고 당시의 아이들은 정말 순수했어요. 아이들이 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도 교원들의 지도에 따라 해냈죠. 아이들과 교원들이 하나가 되어서 환경 정비 같은 일들을 수월히 진행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교원 연수소가 고자 고등학교 내에 생겼죠. 거기서 반년 동안 훈련을 받으면 교사가 될 수 있었어요. 제일 힘들었던 건 토요일과 일요일 강습이었죠. 약 반년 동안 토요일 오후, 일요일은 종일반으로 슈리의 류큐 대학에 다녔습니다. 다양한 교육을 받고 아이들을 돌보거나 수업을 담당했죠. 그 외에도 종종 학점을 딸 수 있는 연수회가 열렸어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연수회장으로 달려가 두세 시간 정도 강의를 듣는, 그런 방식의 연수회였죠.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종전 후)우리는 서로 돕고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친척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부흥을 위해 노력했어요. 종전 직후의 주민들은 모두 대단한 분들이죠. 지금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돕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현재의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대가 이렇게 존재하는 건 여러분의 선배님들이 노력한 덕분에 지금과 같은 멋진 세상이 만들어진 거니까, 여러분도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지금보다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줬으면 합니다.
이하 간유 씨는 모교의 임시 교원으로 시작해 약 40년간 학교 교육에 종사했습니다. 퇴직 후에는 인권 옹호 위원으로서 지역의 인권 옹호 추진에 공헌했습니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1998년에 법무대신 표창, 2012년에는 서보 쌍광장을 수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