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LANGUAGE

요미탄에서 북부로의 피난, 부족한 물자. 전쟁은 모두가 상처를 입는다

“요미탄에서 북부로의 피난, 부족한 물자. 전쟁은 모두가 상처를 입는다.”
다마키 히데아키(玉城 秀昭)씨 87세
(출신지: 오키나와현 요미탄손 도케시)

(진주만 공격)
 1941년(쇼와16년) 12월 8일에 진주만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선생님들이 ‘많은 적의 군함을 침몰시켰다.’ 등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저는 ‘일본은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자는 빨리 군인이 되어 나라를 위해서 일하세요. 빨리 군인이 되는 것이 지위도 빨리 오를 수 있어요. 많은 부하도 생기고 더 높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라고 선생님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듣고 우리는 ‘그래. 그렇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분발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입니다. ‘너희들은 해군에 지원하러 갔다 와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해군에 지원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지원할 때 받는 검사에서는 키와 체중에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 기준에 미달이면 불합격이 됩니다. 저는 키도 체중도 기준 미달이었습니다. 결국 불합격이 되었습니다. 그 때 만약 합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가 죽는다고는 티끌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0·10공습)
10·10공습이 시작된 것은 아침 8시가 되기 전부터였습니다. 요미탄 비행장에 전투기가 날아들어 쾅, 쾅 폭탄을 떨어뜨리고 갔습니다. 그곳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도케시의 지하에는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 벙커가 있었습니다. 모두 그곳에 피난해 있었습니다. 틈틈이 우리는 미군의 공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함선이 전부 공격을 당했습니다. 나하의 거리도 전부 소이탄이 떨어져 불에 탔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 후 우리는 군에 동원되었습니다.

우리는 전차 벙커를 파거나 참호를 파는 등 군작업에 동원되었습니다.
학교는 일본군 각 부대의 막사로 몰수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업은 없었습니다. 그 대신 방공호를 파러 갔습니다.

  
오키나와 상륙을 위해서 미군에 의한 공습이 시작된 것은 1945년(쇼와20년) 3월 23일이었습니다.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공습 때문에 졸업식도 못했습니다. 다음날이 되자 여기저기 마을에도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일은 없었습니다. 바로 근처에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쾅 소리가 나고, 기관총 소리도 났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폭탄으로 인해 땅이 울렸습니다. 폭탄이 떨어지면 처음에 섬광이 보였습니다. 그 후 땅이 울렸습니다. 그 후에 소리도 들렸습니다. 벙커의 흙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3월 23일, 24일, 25일 낮까지 공습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날 오후에는 공습이 끝났습니다. 매우 고요했습니다. 우리는 벙커에서 나와 바다를 보았습니다. 바다에는 군함과 수송선 등 많은 미군 함선이 있었습니다. 그 함선을 발판으로 하면 게라마 열도까지 건너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배였습니다. 바다 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의 군함이었습니다.


(북부로의 피난)
 ‘주민은 전원, 북부로 피난하십시오. 이곳은 머지않아 전투지역이 됩니다.’고 했습니다. 주민들은 발칵 뒤집혔고, 방공호 안에서도 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노인도 있었습니다. ‘북부까지 걸어 갈 수 없다. 여기에서 죽는 편이 낫다. 나는 피난을 가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마을에서 출발해서 야마다의 현도로 나갔습니다. 그곳에는 중남부에서 온 피난민이 가득 있었습니다. 누구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 묵묵히 북쪽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피난을 가고 있을 때 30명 정도의 일본군인들이 마주 지나갔습니다. 대포를 끌고 우리와 반대 쪽으로 갔습니다. 군의 이동과 마주친 것은 이 한 번뿐이었습니다.


(피난처에서)
우리 가족이 피난하고 있는 곳에도 나고에서 상륙한 미군이 가까이 왔습니다. 피난을 위해서 산 위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4월 7일인가 8일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부터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에는 피난민을 위한 오두막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아마 현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오두막인 듯 했습니다. 오두막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우리처럼 피난 명령으로 피난한 사람부터 할당된 장소의 일부를 받았습니다. 그 외 사람들은 산에 올라와도 오두막집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비를 피할 곳은 나무 아래, 혹은 바위 아래뿐이었습니다.

한 때 마을 근처에서 감자를 캐고 있어도 미군에게 붙잡히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피난민이 어느 날 갑자기 미군에게 붙잡혀서 하네지의 다이라 수용소로 끌려 갔습니다. 그 사람으로부터 그 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큰 주먹밥을 배부르게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수용소에서 가족을 데리러 왔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스파이다.’고 소문이 나 모두 비상이 걸렸습니다. 중남부에서 도망쳐 온 패잔병이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스파이가 아니다. 당신처럼 내 장남도 남부의 전쟁터에 가서 싸우고 있다. 그런데 왜 나를 죽이려 하는가?’라고 그 사람이 말해서 그 사람은 다행히 죽지 않았습니다.

일본군들이 우리 피난민의 집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내일 돌격을 하러 가는데 쌀을 조금 나누어 줄 수 없겠냐고, 영양(체력)을 보충하게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격을 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돌격을 간다고 거짓말을 해서 먹을 것을 얻으러 왔던 것 같습니다.
산에서 내려 온 것은 1945년(쇼와20년) 7월 23일이었습니다. 미군이 ‘죽이지 않을 테니까, 괜찮아’라고 해서 우리는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나에게는 죽임을 당하는 것에 대한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가르침에서는 적에게 붙잡히면 ‘남자는 코를 베고, 귀를 베고, 눈알을 파낸 후 죽인다. 여성은 농락하고 나서 죽인다.’고 했습니다. ‘붙잡히는 것보다 스스로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집단자결도 있었을 것입니다.


(산을 내려와서)
‘죽이지 않는다’고 산 밑에서 연락이 있어서 우리도 산을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어른들이 상의해서 결정한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남부에서 싸우고 있다. 그런데도 적 앞에 항복하러 갈 거냐? 그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웃 마을은 이미 산을 내려갔다. 죽이지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우리도 내려가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 마을은 그렇게 협의를 하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산을 내려 와도 식량 배급이 없었습니다. 중남부 피난민에게는 식량 배급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북부 사람에게는 없었습니다. 아마 여기까지 도착하는 물자가 적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에 남은 사람들)
(붙잡혀도 죽이지 않는다)는 정보가 없는 사람들은 내내 산에 숨어 있었습니다. 정보가 있는 사람은 산에서 내려왔지만, 정보가 없는 사람은 9월까지 산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일단 포로가 되어 산을 내려가게 되어도 다시 도망쳐서 산으로 들어 갔습니다. ‘붙잡혀서 죽는 것 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전쟁을 되돌아보며)
전쟁에서는 이겨도 져도 모두 상처를 입습니다. 평화보다 감사한 일은 없습니다. 전쟁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서는 안됩니다. 전쟁만은 절대로.